‘콘클라베’(2024)는 로렌스(랄프 파인즈)의 뒷모습으로 막을 연다. 그의 발걸음을 따라가 목격하게 되는 것은 급작스러운 교황의 선종이다. 종교적 권위의 정점에 서 있던 상징적 가부장의 죽음. 만인의 존경을 받던 아버지가 사라지자, 생전 그의 위광 아래 숨죽이던 아들들은 저마다의 야망을 품고 공석이 된 옥좌에 오르고자 이빨과 발톱을 드러낸다. 추기경단 단장인 로렌스는 애도할 틈도 없이 다음 교황을 선출하는 절차를 빠르게 진행하는 것으로 내분의 불씨를 진화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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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콘클라베’의 한 장면. |
과격파와 진보파가 대립하고, 그 틈새에서 제 잇속만 차리는 모리배들로 넘쳐나는 정치적 내전 상태. 그리고 이러한 시기에 가장 고뇌하고 번민하며 희생양이 되기 쉬운 유형의 인간은 넘어선 안 될 선을 알고 질서와 인문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온건한 상식인이기 마련이다. ‘서부전선 이상없다’(2022)에서 마티아스가 독일의 패배를 인정하고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것으로 1차 세계대전의 참극을 종결지었듯, 로렌스는 교황의 자리를 둘러싼 분쟁을 관리하고 극우화의 위험에서 가톨릭교회를 건져내고자 한다. 총성이 울리지 않을 뿐, 감독의 관점에선 ‘콘클라베’ 역시 일종의 ‘전쟁’ 영화인 셈이다.
영화의 메시지는 철저하게 계산된 시각적 연출에 감춰져 있다. 치밀하고도 강박적으로 통제된 프레임을 통해 영화의 의미를 조형해 내려는 형식 미학적 완벽주의는 오늘날 다른 데선 좀처럼 찾기 어려워진 미덕이 아닐 수 없다. 이 영화는 엄격한 좌우대칭 구도와 기하학적으로 깔끔하게 정돈된 공간의 선과 면을 강조하는 한편 스카이라인을 극도로 낮게 제한하는데, 이는 교황청의 전통과 질서가 유서 깊은 만큼이나 얼마나 강고한지를 드러내는 동시에 폐소공포증을 자아낼 것처럼 갑갑함을 관객의 흉중에 심어준다. 정결해야 할 교회의 심장부에 도사리는 부패와 타락의 징후는 건축의 르네상스적 아름다움과는 어울리지 않는, 추기경들이 바닥에 버린 수북한 담배꽁초와의 대비로 드러난다.
커튼이 닫히는 창밖에서, 때로는 비좁은 복도 한가운데서 격리된 공간에 처한 로렌스를 포착하는 카메라는 마치 감옥 또는 짐승을 가둔 우리 같은 인상을 자아낸다. 추기경단으로 대표되는 남성중심성의 세계. 절대 무너지지 않을 철옹성 같았던 그들만의 리그에 균열을 일으키는 건 밖에서 찾아오는 외부효과다. 둘째 날 광장에서 있던 폭발의 연기로 드러난 전조는 셋째 날 투표 때 천장의 폭발과 그로 인해 실내로 쏟아지는 빛으로 더욱 본격화한다. 이는 제 3세계에서 온 베니테스 추기경과 허드렛일을 도맡으며 교회를 떠받치지만 콘클라베에 참여할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수녀들처럼 정상성의 바깥에 놓인 채 소외된 질서의 외부자들이 망가진 공동체에 변화의 흐름을 불러올 것임을 암시하는 장치다.
베니테스 추기경의 존재와 동일시되는 거북이는 갇혀 있기 싫어하는 생물의 본성대로 기어 나오고 로렌스는 이를 도로 정원에 넣어준다.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보수적인 공동체도 타 종교, 문화와의 타협과 공존, 여성과 성적 소수자에 대한 엶이라는 시대의 흐름을 포용하게 된 것이다. 작은 진보의 한 걸음을 내딛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지난한 분쟁과 교섭의 과정을 치러야 하는가를 ‘콘클라베’는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