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의 문턱을 밟고 한 시민이 '낡은' 공로패 하나를 가지고 본사 편집국을 찾아왔다. 부산 북구 화명동에 산다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웬 공로패인가 했더니, 뜻하지 않게도 음악가 윤이상 선생에게 주는 상이었다. 상패 케이스는 빛이 바랬고 먼지가 보풀거렸다. 케이스를 열자 다시 뽀얀 먼지가 피어났다.
'특별 공로예술인상-윤이상(음악부문)
작곡가 고 윤이상 선생은 현대사회의 보편적 음악언어가 된 유럽음악에 우리의 정서를 용해시킨 작곡가로서 한계에 달한 유럽음악에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선생께서는 1995년 11월 3일 타국땅에서 영면하셨습니다. 이제 부끄러움과 후회스러움을 가눌 수 없는 심정으로 선생께 공로상을 드립니다. 1995년 12월 14일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변인식'
내막을 알아보니 이랬다. 윤이상 선생의 음악적 성취를 높이 평가해오던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는 1995년 11월 4일 그가 독일 베를린에서 작고하자 특별 공로예술인상을 주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받을 사람이 없었다.
베를린에 연락을 했으나 윤이상 선생의 유족은 조국에 올 수 없는 처지. 고심 끝에 부산에 있던 윤이상 선생의 친구 김점덕(성악가) 씨가 대리 수상한다. 상패를 보관하던 김 씨는 1997년 작고했다. 이를 보관해오던 가족들은 윤이상 선생의 부인 이수자(80) 여사가 고국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문사에 들고와 전달을 희망한 것이다.
'받지 못한' 이 공로패는 윤이상에 대한 국내의 평가와 조명이 보류되었던 저간의 사정을 말해준다. 공로패를 주려던 199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윤이상은 '빨간색 리스트'에 갇혀 있었다. 그에게 상을 준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했다.
국내에서 '윤이상 귀환'이 논의되고 조명·평가작업이 이뤄진 것도 따져보면 얼마 안된다. 통영국제음악제가 태동한 것이 지난 2002년 3월이다. 그후 윤이상은 한 걸음 두 걸음씩 우리 곁으로 다가왔고, 급기야 부인 이수자 여사의 고국방문까지 성사됐다.
지난 10일 40년 만에 고국땅을 밟은 이수자 여사는 "눈부시게 발전한 고국이 낯설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되도록 말을 아끼려 했다. 통영에 세워진 윤이상 선생의 동상에 그를 험담하는 낙서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정말 가슴이 아팠다고 털어놓았다. 이처럼 윤이상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고 있다.
이수자 여사의 고국 방문 못지않게 관심을 모으는 것이 윤이상의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 한국 초연이다. 그 벅찬 무대가 20일 저녁 부산문화회관에서 펼쳐진다.
문익환 고은 박두진 백기완 등의 시에 곡을 붙인 이 작품은 1987년 평양에서 북한국립교향악단에 의해 처음 연주된 이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당시 남한에선 김일성 주석에게 헌정된 작품이란 말이 떠돌았다.
이 점을 상기하며 어떤 기자가 이 여사에게 물었다. "헌정된 게 맞느냐?" 이 여사는 조용히 대답했다. "당시 남한에는 군부 독재정치가 이뤄지고 있었는데, 어떻게 공연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래서 평양 무대에 올렸는데 마침 그때 살아있던 (김일성) 주석이 참석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모릅니다."
20년 전의 일이다. 더 캐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윤이상과 이수자 여사가 고국땅을 밟고 있고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분단을 아파하고 조국을 사랑한 윤이상, 그를 외면한 조국의 '남쪽'에 그의 칸타타가 울려 퍼진다는 것은 역사적 사건이다.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냉전과 반목을 씻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수자 여사는 지금 '경계인'이다. 그에게 상처를 씻으라고 말하기보다, 우리가 다가가 그의 상처를 씻어줘야 하지 않을까. 이 여사는 부산이 고향이다. 부산엔 그의 음악적 지기(知己)들이 적지 않다. 피아니스트 제갈삼 선생이 그렇고, 고인이 된 금수현 김점덕 씨 등이 그렇다. 이들의 교분은 지역음악의 자산이다.
상처 속에 핀 음악이 상처를 씻는 감동을 그려본다. 오늘 저녁 부산문화회관은 분단의 상처를 씻는 눈물이 바다를 이뤄도 좋으리. 공연과 함께 이수자 여사가 챙겨가야 할 것이 있다.
12년 전에 준 특별 공로예술인 상패다. 윤이상 선생의 친구가 대신 받아 보관했다는 먼지 낀 그 상패 말이다.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