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선동열(45) 감독. 지난 1999년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센트럴리그 우승을 이끈 뒤 은퇴했다. '나고야의 태양'에게 주니치는 연봉 4억 엔과 플레잉 코치를 제시하며 재계약을 요청했고, 일본 내 다른 팀들과 메이저리그에서도 '러브콜'을 했지만 그는 모두 포기했다. "놀고 먹어도 수십억 원을 벌 수 있지만 조금 아쉬움이 남더라도 좋은 모습으로 은퇴하고 싶었다"고 그는 당시를 회상했다.
롯데 왼손 투수 주형광(31). 부산고를 졸업하고 1994년 프로로 직행, 데뷔 후 3년 연속 두 자리 승수를 기록했다. 96시즌에는 다승왕과 탈삼진왕을 차지했다. 오직 롯데 한 팀에서 14년을 보낸 그는 지난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일본으로 코치 연수를 떠나 제2의 야구인생을 시작한다. 아직 젊은 나이에 다른 팀에서 일자리를 구해 볼 법도 하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간단명료했다. "롯데에 남고 싶다. 롯데와 함께하고 싶다."
마해영(38). 그는 현재 롯데 김해 상동연습장에서 새까만 후배들과 함께 입단테스트를 받는 처지다. 1995년 롯데에 입단, 소총부대 롯데의 간판 왕대포로 이름을 날렸으나 선수협 활동 때문에 삼성으로 트레이드됐고, 이후 KIA LG 등을 떠돌았다. 심판을 기다리는 그의 각오는 비장하다. "자존심을 버렸다.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기 위해 고향팀으로 돌아왔다. 조건도 안 따지고 싶다."
정상에 섰을 때 명예롭게 떠날 것인가, 정상에 서지 못해도 시기가 됐음을 알고 떠날 것인가, 화려했던 옛 명성을 되찾고 떠날 것인가. 3명의 야구 선수를 생각하다 문득 '언제 어떻게 떠날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본다. 어느 게 정답일까.
성적에 따라 평가받고 진퇴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 프로선수뿐이랴.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국회의원이라면 의정활동, 지역구활동, 당에 대한 기여도 등이 중요한 잣대가 될 것이다. 17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고 17대 국회의원들의 성적표도 나왔지만 떠나는 사람이 드물다. 대선 참패의 대통합민주신당이라면 "내 탓이요"라며 책임지고 떠나야 정상인데 대부분 자리를 지키며 눈치만 보고 있다. 한나라당이라면 "정권교체를 위한 역할은 끝났다"며 떠나는 중진의원들이 나올 법도 한데 '역시나'다.
오는 4월 18대 총선은 정권 교체 이후 치르는 첫 선거다. 어느 때보다 많은 정치 신인들이 등장하고 공천 경쟁은 치열할 전망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대선을 통해 변화를 갈구하는 민심을 확인했으니 공천 물갈이는 불가피하다. 그런데 자발적으로 떠나는 정치인은 아직 극소수다. 야구 선수들처럼 명예롭게 은퇴하겠다거나 만족스럽진 않지만 미련을 버리고 떠나겠다거나 가장 낮은 자세로 객관적인 평가를 받겠다는 정치인을 찾아보기 힘들다.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고 명예롭게 떠날 수도 있으련만, 보직을 내놓고 뒷자리로 물러날 수도 있으련만, 은퇴는 안중에도 없고 목에 힘주고 최대한 버텨 보겠다는 속셈인 것 같다.
새들은 어디에 둥지를 틀어야 하는지, 언제 둥지를 떠나야 하는지 안다. 하지만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누린 정치인들이 안타깝게도 둥지를 틀어야 할 때, 떠나야 할 때를 모르고 있다. 너무 오래 있어 편해서일까. 비좁은 둥지를 떠날 생각을 않는다. 허술한 둥지를 튼실하게 만드는 노력은 않고 혼자 살겠다고 엉뚱한 곳에 둥지를 틀어 볼까 궁리한다. 줏대 없이 패거리를 따라 움직인다. 새보다 못한 철새 정치인이 아니고 무엇이랴!
백범 김구는 '나의 소원'에서 역설했다.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고. 고인 물에 물꼬를 틀 정치인은 없는가. 이러한 자세로 기득권을 버리고 떠나는 정치인이 나온다면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다. '대통합민주신당이 국민의 신뢰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 '한나라당이 정권교체의 소원을 이뤘으니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
망설이는가. 이기형 시인의 '낙화'를 음미해 보자.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래도 결심이 서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충고한다. 박수칠 때 떠나라! 박수 안 쳐도 떠나라! 추한 모습 보이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