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 중에 '바캉스'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주인공은 평생 모은 저금을 털어 1666년 루이 14세 시대 프랑스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가장 화려하고 고상했던 시대를 직접 체험해보고 싶다는 꿈을 안고. 하지만 베르사유 궁전 정원에서 우아한 숙녀들과 파티는커녕 파리떼와 진동하는 오물냄새, 몸에 지린내가 밴 사람들과 전염병이 창궐하는 파리의 뒷골목에서 곤욕을 치르다 마법사로 몰려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 가까스로 귀환한다. 역사에 대한 단견과 환상을 베르베르 특유의 유머로 뒤튼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프랑스인들은 유별나게 바캉스를 챙기고 즐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7월 휴가철에 접어들면 전국의 공항, 기차역, 고속도로가 몸살을 앓는다. 캠핑카들이 고속도로를 가득 메운 광경을 보고 우리나라의 설·추석 귀성전쟁이 연상되기도 했다. 36일을 법정 휴가로 책정하고 있으니 바캉스 한 달여를 위해 일한다는 말을 들을 법도 하다. 하지만 올해는 유가폭등과 경기침체로 주머니가 얇아진 탓에 사정이 좀 다른 모양이다. 프랑스 여론조사기관인 이폽(ifop)의 설문조사 결과 올 여름 바캉스를 떠나지 않고 집에 머물기로 한 '노캉스족'이 42%에 달했다고 한다. 3년 전보다 10%포인트 늘어난 것이다.
여름휴가 1주일 찾아 먹으려면 상사 눈치까지 살펴야 하는 우리네 형편에선 프랑스와 비교하기 힘들겠지만 언제부터인가 바캉스가 보편화됐다. 휴가철에 접어들면 어김없이 '해외여행객 급증…관광수지 적자 확대' '주말 고속도로 북새통' 같은 기사들이 단골메뉴로 오른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올해는 특별한 휴가계획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상당수가 2~3일씩 여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법정 휴가를 쓰려는 것만 봐도 멀리 해외여행을 가는 인파도 예년보다 줄어든 게 분명하다.
휴가비 한 푼 못 받아도 휴가가 주어지는 직장인은 그나마 행복한 편이다. 직장 동료들 모두 여름휴가 가는 것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 일용직·비정규직도 많고 첫 직장이 신통찮아 휴가 기간 이직을 위해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새내기 직장인도 적지 않다. 더 이상 노는 게 죽을 맛인 30대 미취업자도 수두룩하고, 1년 내내 '휴가'를 받은 40, 50대 백수도 부지기수다.
그러니 '노캉스족'이니 '방콕족'이 됐다고 침울해 할 일은 아니다. 이참에 사흘 정도 집에서 하릴없이 뒹굴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현관문도 나서지 말고, 잠 오면 자고, 배 고프면 계란 풀어 라면 끓여 먹고, 또 자고. 그야말로 '방콕'이다. 이런 철두철미한 '방콕'은 사흘 이상 하기 힘들다.
그러다 지겨워지면 시간여행을 떠나는 거다. 베르베르의 '바캉스'와 같이 수백년씩 시대를 넘나드는 시간여행은 경비가 많이 드니 이번에는 접어두자. 10년씩 과거와 미래를 오가는 상상여행이면 족할 것 같다. 지난 10년 지나온 일상의 궤적이든, 별로 내세울 것 없는 가족사든, 무엇이든 상관없다. 앞으로 10년도 마찬가지다. 10년 뒤 오늘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그려보는 일도 심심파적으로는 제격이다. 과거 10년을 진지하게 성찰하거나 미래 10년의 청사진을 구상하려든다면 이는 휴가가 아니고 골치 아픈 업무의 연장이다. 마냥 상상하는 것이다. 몽상이면 어떻고 환상이면 어떤가. 현실에서 한발짝이라도 발을 떼면 큰일이 날 것처럼 여기는 공상의 결핍이 정녕 이 시대의 문제가 아니던가. 미래 10년의 시간여행에서 타임머신의 연료가 바닥날 것 같은 불안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게 다름아닌 상상력의 부재다.
시간여행을 통해 10년 앞을 내다보는 통찰을 얻는다면 큰 보람이겠지만 어차피 무엇을 기대한 여행이 아니었던 만큼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8월 초순 이미 여름휴가를 다녀온 사람도 많겠다. 그렇다면 오는 주말이나 휴일 방 안에서 뒹굴면서 10년씩 과거와 미래를 왕복하는 시간여행을 권하고 싶다. 휴가를 받지 못하거나 받을 곳이 없는 이웃들도 이 여행에 동행이 되자. 어릴 적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다 신기하게 생긴 조개껍데기 몇 개 주워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미래의 시간여행 속에서 꿈을 몇 개 따오는 행운을 잡는다면 그것은 '열심히 사는 당신'에게 신이 주는 보너스다.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