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 1. 지난달 23일 오후 부산문화회관 대극장, 국립발레단(예술감독 최태지)의 '지젤' 공연이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1막에서 지젤과 알브레히트가 얼싸안듯 추는 파드되(2인무)는 보는 이의 심장을 스르르 녹여 놓았다면, 마을처녀들이 추는 절도 있는 군무는 풀어졌던 심장을 다시 고동치게 만들었다. 얼마나 훈련했으면 저렇게 한몸 같은 집단 동작이 나올까, 하고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저만치 아래쪽 관람석에서 '비상사태'가 터졌다. 한 꼬마가 정적을 깨고 칭얼대기 시작한 것이다. 순간, 아빠인 듯한 남자가 폭약을 안고 적진으로 돌진하는 결사대처럼 아이를 품고 좌석을 떠나 공연장 출입문을 빠져나갔다. 비슷한 상황이 2막의 하이라이트, 처녀귀신 윌리들이 집단으로 춤출 때도 일어났다. 역시 보호자인 한 남성이 아이를 보듬고 번개처럼 퇴장해 비상사태 해제. 공연이 끝나고 실내 조명이 밝아졌을 때 좌중을 둘러보니 아이를 동반한 젊은 부부 관객이 제법 많이 눈에 띄었다.
상황 2. 2008부산비엔날레가 개막한 지난 6일. 개막식이 끝나자 하객들은 '현대미술전'을 둘러보기 위해 부산시립미술관으로 들어섰다. 이두식 비엔날레운영위원장이 허남식 부산시장을 위시한 주요 하객들에게 출품작품들을 설명하며 전시장을 안내했다. 현역 서양화가인 이 위원장은 이번 비엔날레가 대중들이 친근감을 느끼도록 애썼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무게 잡지 않고' 설명했다. 그 하객 중 한 사람인 조일상 부산시립미술관장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호응했다. 그러면서 그는 가끔 뭔가를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상황 1, 2는 부산 문화 현장에서 실제로 일어난, 언뜻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들로 보인다. 하나, 지역 문화에 대해 예민한 촉수를 가진 이에게는 결코 예사롭지 않은 풍경이다. 상황1을 보자. 정숙해야 할 공연장에 말귀도 못 알아듣는 꼬마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들을 예의범절이 없다고 나무라야 할까. 그렇게 삐딱하게 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주변의 눈총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기자의 눈에는 아직 어린 자녀를 데리고 주말 공연을 보러 온 젊은 부부의 열성이 오히려 갸륵해 보였다. 하필이면 '지젤'의 명장면마다 대피(?)하는 바람에 편안하게 공연을 즐기지 못한 그 남성들이 안쓰러웠고, 문화회관 내에 이런 아이들을 위한 탁아프로그램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면 부산에는 그렇게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 수요가 생각보다 융성하다는 것이다. 더 이상 '부산은 문화 불모지' 운운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이번엔 상황 2다. 근간의 부산시립미술관 사정을 알고 있는 이라면 조 관장의 '고민'을 헤아리는 건 어렵잖다. 지난 3일 본지 '기자수첩'이 지적했듯이, 부산시립미술관은 수년째 외부 전시 대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2년마다 치르는 부산비엔날레의 현대미술전에 두 달 10여 일, 매년 부산미술협회가 개최하는 부산미술대전 수상작 전시에 두 달여 대관해주면서 자체 전시 공백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이래선 시립미술관이 고유의 색깔을 가져 품격을 한 단계 올리기는 요원하다는 지적이 계속 나왔지만 해결될 기미는 없다. 만일 부산비엔날레나 부산미술협회에 전용 전시관이 있다면 이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상황 1,2를 묶어보면 지역 문화현장의 밑그림이 한 장 그려진다. 부산의 문화 수요가 늘어나고 시민들의 향유 욕구도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지만 지역 인프라는 제자리걸음이다. 그런데 서울 쪽은 사정이 좀 달라 보인다. 얼마 전 정부는 서울 기무사 터에 국립미술관 분관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과천 본관은 멀고, 덕수궁 분관은 작아서 서울시내에 분관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한국의 수도이며 제1의 도시이니 국립미술관 두세 개 정도는 있어도 나쁠 게 없다. 나아가 제2의 도시인 부산에도 이제 국립미술관을 건립해야 한다고 주장해도 무리가 아니게 됐다. 그런 참에 유인촌 문화관광부 장관은 지난 3일 '품격 있는 문화국가'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는데, 한마디로 실망스럽다. 여전히 서울지역에 한정시킨 얘기로 들렸다. 부산에도 엄연하게 문화가 존재하고, 주민들도 그걸 누릴 줄 안다. 온 나라가 문화를 고루 나눠야 전체 품격이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