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의 끝자락에 섰다. 어둡고 길었던 한해를 무거운 마음으로 보내야 한다. 가는 해는 늘 아쉽지만, 눈앞에 닥친 절망은 감정의 호사마저 허용하지 않는다. 노숙자들은 지하도를 메우고 급식소의 행렬은 동짓달 그림자만큼이나 기다랗다. 가장들은 밤잠을 설치고 날품일꾼들은 새벽 인력시장에서 끼니를 걱정한다. 얼어붙은 취업전선에 무릎 꺾인 청춘들의 한숨이 깊다.
불안과 절망의 깊이는 내일의 불확실성과 비례한다. 경제가 곤두박질치고 주가는 반토막이 됐다. 하지만 내일은 더욱 추울 것이라는 불길한 소문이 나돈다. 이 절망의 뿌리는 어디인가. 미국발 금융위기인가. 그뿐만 아닐 것이다. 경제위기 뒤편에 어른거리는 어두운 그림자를 본다.
올 한해는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어륀지'인수위는 얄팍한 실용의 밑천을 드러내며 국민을 당혹케 했다. 실수일 거야, 자위해 봤지만 그게 아니었다. '강부자' '고소영 S라인'이 득세하면서, 적당히 분노하고 포기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했다. 그들이 말하는 희망은 절망으로 다가왔고 그들이 외치는 개혁은 퇴행으로 뒤통수를 후려친다.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었다.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은 양극화를 부채질했다. 경제를 살린다, 민생을 안정시키겠다는 약속은 처음부터 삐걱거렸고 나라경제의 기초체력을 소진시켰다.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한 전대미문의 경제위기를 당하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전세계가 경계하고 나선 신자유주의 자본만능을 맹신하며 아직도 '장밋빛 747'의 유혹에 허우적거린다.
어려울 때일수록 보호 받아야 할 서민들은 안중에도 없다. 한 시간 3770원인 최저임금조차 비싸다며 무장해제를 음모한다. 주 44시간을 꼬박 일해 주휴수당까지 합쳐서 한달에 85만 원이다. 연봉 1000만 원을 '우리 경제수준에 비해 과도하다'고 깎으려 들면서도 수십 조짜리 부자 감세는 거침없이 밀어붙인다. 서민과 노동자를 길거리로 내몰고 부자와 기업주를 신주단지 모시듯 떠받든다. 기업만 잘 굴러가고 부자만 잘 살면 절로 일거리가 생기고 돈이 풀려, 서민들의 등이 따습고 배가 부를 것이란 말인가.
균형 잃은 경제정책이 양극화를 부채질 하는 새, 상식을 벗어난 역사 뒤집기는 내부를 분열시키면서 사회를 경직시키고 있다. 보수세력의 집요한 역사공정은 끝내 이념전쟁의 칼을 빼들었다. 전교조가 반국가 이적단체로 낙인 찍히고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21세기에 한 세기 전의 매카시의 망령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빨갱이'로 밀어붙이는 저 오만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미래 세대를 온전하게 키워내야 할 교육당국은 좌편향 역사를 바로잡겠다며 우편향에 앞장선다. 수구적 역사관으로 점철된 '기적의 역사'를 전국의 초중고에 뿌리고 특정 이념을 강요한다. 경제 개발을 미화하다 보니 독재의 폐해는 망각되고 헌법정신인 4·19까지 데모로 왜곡됐다. 시민들이 목숨을 걸고 기적처럼 일궈낸 민주화의 기억, 광주민주화운동과 6월항쟁은 역사에서 아예 지워 버렸다.
보수세력의 역사 뒤집기는 국민의 사상을 옭아매고 기업 프렌들리는 벼룩의 간을 내어 부자들의 배를 채웠다. 한해 내내 퇴행하는 역사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절망하지 않았다면 그게 이상한 것 아닌가. 이제 그 절망 속에서 겨자씨만큼의 희망이라도 찾아내야 한다. 어둠의 깊은 심연에 싹을 예비한 희망을 햇볕 속으로 불러내야 하지 않을까.
부자들이 수천억 원의 재산을 편법 승계하고 수백억 원의 주가를 조작하는 세상에, 한달 30만 원의 생활보조금을 나눠 헐벗는 3세계 어린이들을 돕는 장애인의 사연이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약탈 당하는 이 땅의 뭇생명을 위해 삼보일배에 나서는 민초들의 생명순례에서 희망의 싹을 엿본다. 이 겨울 절망의 이유이기도 했던 금융위기, 탐욕이 부른 재앙의 현장에서도 희망의 씨앗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무한경쟁과 욕망을 넘어서 생명의 가치를 온전히 바라보는 자기성찰이 바로 희망의 노래 아니겠는가. 어려운 가운데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가난한 장애인, 뒷걸음질치는 역사 앞에 두려움 없이 맞섰던 유모차 주부, 본전도 안 되는 농사를 포기하지 않은 농부들이 희망을 노래해야 한다. 정직하게 살려고 애쓰는 당신이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