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문화평론가 진중권이 겸임교수로 재직했던 중앙대에서 재계약 거부통보를 받아 논란이 되고 있다. 설사 겸임교원의 재계약 여부는 학교당국의 재량권에 속한다고 할지라도, 위촉당사자인 소속학과의 견해나 학생들의 수업권 등을 고려하면, 이번 사태는 결국 학문 외적 이유로 유력한 지식인이 대학 밖으로 추방된 명백한 사례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
진중권을 명예훼손 등의 이유로 고소한 젊은 뉴라이트 논객은 노골적으로 그를 시장에서 퇴출시키겠다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시장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대학에서 진중권의 교권은 수모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강의를 그만둔 실정인데다가, 뉴라이트에 의한 한예종 구조조정의 핵심적 근거로 전임교원도 아닌 그가 거론되는 수모를 겪었던 것도 환기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그는 각종 민형사상의 송사로 원치 않는 피로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물론 그가 이 번거로운 송사에서 결국 스스로의 정당성과 존엄을 회복할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대학에서 해직도 되어 보고 필화 때문에 송사도 여러 번 겪어본 내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은 소모적이고 또 지식인 진중권의 창조적 역량을 분산시키는 우울한 환경을 조성할 것임에 틀림없다.
사실 법적·윤리적 정당성과 무관하게 진중권이 이토록 피로한 삶의 정황에 처하게 된 것은 그가 드물게 뛰어난 시대의 논객이자 이 정권 들어 횡행하고 있는 유사 파시즘적 반동에 대한 날카로운 고언을 직설적으로, 때로는 풍자적으로 제출한 까닭이다. 게다가 그의 촌철살인은 뉴라이트의 혐오와는 비할 데 없는 광범위한 대중적 동의를 얻고 있는 까닭에, 그와 정치적 입장이 다른 극보수 세력의 정파적 판단 속에서는 신속히 잠재워야 할 장애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대학에서 그가 추방되었다고 할지라도, 시장체제가 내포하고 있는 기묘한 탄력성과 개방성 탓에 진중권의 상징적·현실적 활동은 그 반경이 오히려 확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시장자유주의를 역설하는 뉴라이트가 이 시장의 모순적인 자율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한 개인이 시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식의 사고를 노골화하고 있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뉴라이트 세력이 진중권을 법적·제도적·담론적으로 모욕하면 할수록, 반비례하여 진중권의 사회적 영향력은 더 큰 정당성을 확보하고, 그의 개인화된 고통에 대해 지식인은 물론 대중들의 공공적인 수준에서의 감정이입은 더욱 심원해지는 것이다. 그게 담론 시장에서의 이른바 대응생산성(counter productivity)라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정권 들어 진중권뿐만 아니라 이른바 비판적 지식인에 걸맞는 사명감을 갖고 있는 무수한 인사들이 각각의 영역에서 추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비단 관료나 지식인, 언론인과 같은 공인들뿐만 아니라, 네티즌 미네르바를 포함하여 자기 소신이 뚜렷한 사람들이 망명객과 비슷한 처지로 추방되고 있다. 추방의 과정에서 그들 대부분이 감당할 필요가 없는 모욕에 무한 노출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냉정하게 보면 이것은 한국판 메카시즘이며, 주체적으로 말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제도적으로 박멸하겠다는 체계적인 적의의 산물이다. 그런데 뒤집어 보면, 이것은 동의에 기반한 소통과 정치의 불가능성에 직면한 세력들의 현실적·심리적 공포가 낳은 오도된 공격성의 명백한 사례인 것이다. 담론에 의한 헤게모니 전략이 실패하게 되니까, 상스러운 제도적 폭력이 남발되는 것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제대로 된 이성을 가지고 타인에 대한 따뜻한 감성도 포기하지 않고, 더 나은 공동체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엉뚱한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생각하면서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현안에 대한 싸움도 그칠 수 없는 것이지만, 오늘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권력의 패악상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좀 더 품위 있는 사회에 대한 말랑말랑한 비전을 치열하게 구상해야 한다. 공부와 토론도 그칠 수 없다. '추방된 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다시 읽고 다시 써야 한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