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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줄도 출구도 하나뿐인 사회 /김재기

획일화된 잣대로 삶의 가치 재는 사회

행복은 줄서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9-09-09 21:23:21
  •  |   본지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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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근무하는 대학에는 도서관, 강의실, 체육관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십여 층짜리 대형건물이 있다. 수강생 수가 많은 교양과목들이 여기에 배정되는데, 문제는 이 건물의 승강기가 너무 작고 그 수도 적다는 데 있다. 강의시간이 임박하면 수많은 학생들이 한꺼번에 승강기에 몰리는 바람에 큰 혼잡이 일고, 더러는 길게 줄서서 기다리다가 수업에 늦기도 한다. 이 건물의 설계자가 왜 이 문제에 대해 미리 대비하지 않았을까 의아하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하다.

별로 자랑거리도 아닌 학교사정을 굳이 들먹이는 건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 건물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많지만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통로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는 사회 말이다. 현대사회의 특징을 지적할 때, 또 우리의 삶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얘기할 때 가장 많이 거론되는 개념들이 바로 다양성, 관용, 이질적인 것들의 공존, 포용 등이다. 이런 말들은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 식상할 정도니까! 하지만 과연 우리는 익숙한 만큼 그것들을 진정으로 수용해서 실천에 옮기고 있는 걸까? 아쉽지만 이 물음에 대한 내 대답은 부정적이다.

최근 우리 사회의 겉모습은 과거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 촌스럽고 획일적이던 사람들과 거리의 외관이 다양하고 화려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변화가 사람들로 하여금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며 서로 다른 꿈을 꾸도록 허용한다는 걸 뜻할까? 특이한 옷이나 액세서리를 사듯이, 우리들 각자는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을까? 또 그렇게 만들어진 수천수만의 다양한 삶들이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걸까? 안타깝지만 대답은 "아니다"이다. 눈에 보이는 삶의 외형적 다양성은 사실 어찌 보면 거대자본이 만들어낸 상품미학의 일부에 불과하다. 눈부시게 화려한 외적 다양성의 이면에선 여전히 단 하나의 가치와 논리, 서열만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가치가 자녀의 학군과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배기량과 자신이 소유한 소위 '명품'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사회! 인간의 가치가 출신대학의 이름과 전공의 종류와 연봉의 크기에 따라서만 결정되는 사회! 새롭고 독창적인, 때로는 불온한 꿈들을 꾸면서 기성의 것을 비판하고 극복해야 할 젊은이들마저 각종 영어시험 점수와 자격증의 가짓수에 목매달고, 심지어 연수나 봉사활동, 여행도 스펙을 보강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사회! 이런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너도나도 팔랑귀에 눈치꾼이 되어 줏대를 잃고 전전긍긍하며, 연예인의 스캔들 따위에 광분하거나 조변석개하는 트렌드를 쫓는 데 귀중한 삶을 허비한다. 이처럼 행복으로, 성공으로 가는 출구가 하나뿐인, 그래서 모두가 그 앞에 길게 줄을 선 채 잔혹하고 무익하며 파멸적인 경쟁을 벌여야 하는 사회가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최근 한국에서는 유례없이 높은 젊은이들의 자살률, 세계 최저수준의 출생률, 점점 심해지는 구직난 등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분명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어쩌면 공통의 원인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건 바로 삶에 대해 단 하나의 가치와 서열만을 강요하는 사회 전체의 잘못된 오리엔테이션이다. 엉뚱한 곳으로 조타된 한국호에 승선한 사람들은 그 배가 허용하는 유일한 출구 앞에 줄을 서고 때론 상대를 밀치거나 새치기도 불사하면서 몸부림치지만, 어차피 그 경쟁의 승자는 극소수일 수밖에 없고 그들 또한 그런 악다구니 속에서 평온한 삶의 기쁨을 만끽할 수는 없다. 예컨대 명문대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실제 열 중 한 명이라면 "누구든 열심히 공부하면 명문대에 갈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일종의 사기다. 차라리 "명문대학을 가지 않아도 좋은 삶을 살 수 있고 그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게 올바른 교육이다. 모두들 21세기의 인재는 인성과 소통능력, 창의성 등을 갖춰야 한다고 말로는 요란하게 떠들어대면서, 그런 능력이 어떤 사회적 환경에서 길러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위선은 이제 끝내야 한다. 오래전 어린 학생들의 입에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절규가 터져 나온 적이 있다. 이제 그 외침을 그 서열을 강요하는 기성세대들에게 돌려줄 때다. "행복은 줄서기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경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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