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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루저의 난`의 교훈 /김재기

경쟁의 틀 속에서만 세상을 보지말고 약육강식 사회 바꾸는 방법 고민을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9-12-16 21:09:55
  •  |   본지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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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키가 180㎝ 이하인 남자는 루저(패배자)라는 한 여대생의 발언이 세상을 시끄럽게 했다. 모 방송의 꽤 이름난 오락프로에 출연한 그녀의 거침없는 선언은 곧 인터넷을 들끓게 했고, 이 사건에는 '루저의 난'이라는 희화적 명칭이 붙을 만큼 파급효과가 컸다. 나 또한 루저인 남자로서 약간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는 없지만, 지금 굳이 지나간 사건을 다시 들먹이는 이유는 잘잘못을 따져 책임소재를 가리거나 빤한 도덕적 훈계를 늘어놓기 위해서는 아니다. 또 아무리 방송이라지만 시사토론도 아닌 오락프로에서 누구나 개인적 의견을 말할 수 있다거나, 솔직히 남자가 자기보다 키 크기를 바라지 않는 여자가 어디 있느냐는 식의 변호도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진 못한다.

이 사건의 본질은 단순히 '루저'라는 자극적 표현에 있는 게 아니다. 사실은 그에 앞서 나온 말이 더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 말 때문에 '루저'라는 표현이 논리적으로 도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키도 경쟁력"이라고! 아마 그녀는 요즘 세상에는 외모 또한 경쟁력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 또한 이런 주장에 굳이 시비 걸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안타까웠던 것은 그녀가 '경쟁'이라는 틀만으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경쟁을 한다. 인간 사회가 약육강식의 정글은 아닐지라도 경쟁은 사회적 삶의 불가피한 요소임에 틀림없으며, 심지어 어떤 이는 경쟁이야말로 진보와 풍요의 원동력이라고 찬양하기까지 한다. 어떤 면에서는 다 맞는 말이다. 특히 개인의 능력과 자유시장을 숭배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사회 전체를 개인들이 서로 경쟁하는 거대한 투기장으로 보는 시각에 모두 익숙해져 있으며, 또 실생활에서 매 순간 그것을 체감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과연 그렇기만 한 것일까? 우리들은 서로 피 터지게 경쟁하고, 우승열패(優勝劣敗)를 가리며 살아야 하는 걸까? 그래서 뛰어난 자는 경쟁에서 이겨 행복해지고, 못난 놈은 루저가 되어 비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현대의 각박한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간과하거나 놓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인간의 사회적 삶 전체가 '협동, 유대, 상호부조'라는 틀로 묶여 있다는 사실이다. 생물학적으로 보잘 것 없는 신체를 지닌 인간이 지구 전체를 지배하는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개개인의 뛰어난 생존능력이나 경쟁심 때문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협동능력 때문이었다. 개인들 간의 협력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사회 그 자체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었다는 건 초등학생도 아는 상식이다. 그리고 인류의 진정한 경쟁력 또한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요즘은 아무도 이 사실을 지적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 부모도, 교사도, 어른들도 입만 열면 어떻게든 개인만의 경쟁력을 키워 남을 제치고 짓밟고 위로 올라서고 살아남아야 한다고 부르짖는다. 그렇게 해서 그들 모두가 성공하고 승리하는가? 어차피 개인들 간의 경쟁이라는 메커니즘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 지원자는 열 명이고, 자리는 하나인 상황에서 "너희들 모두 승리하기만 하면 원하는 것을 얻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사기다. 어차피 아홉 명은 루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의학에서는 징후라는 말을 쓴다. 실체를 직접 드러낼 수 없는 의식의 깊은 심연을 파악하도록 해주는 간접적 단서들이 바로 징후다. 나는 '루저의 난'이라는 사소한 사건이 우리 사회의 무의식을 보여주는 징후라고 독해한다.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는 발언은 단지 외모지상주의의 천박함 때문에 비난받아야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외모까지도 경쟁력이라는 잣대에 따라 판단되는 현실이 더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경쟁력이 절대가치가 되는 순간 인간의 다른 능력은 다 무용지물이 될 것이고, 결국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그 경쟁력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루저' 발언은 사실 우리 모두의 왜곡된 욕망이 투영된 프랑켄슈타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 땅의 어른들이여, 부모들이여, 교사들이여, 이제 '약육강식 사회에서 살아남는 법'만 가르치지 말고 '그런 사회를 바꾸는 법'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경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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