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시론] 무통문명 속의 식인사회 /이명원

타인을 희생양 삼아 안심하는 사회…이것이 바로 현재 한국의 현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09-12-27 20:55:14
  •  |   본지 26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는 이른바 '거대담론'이라는 것을 추방해버렸다. 그 이전까지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한국사회의 사회구성체의 성격과 같은 추상화된 논의가 다방에서 술집에 이르기까지, 앳된 대학생부터 노년의 학자에 이르기까지 열띠게 이어졌다.

거대담론을 논하는 것이 꼭 생산적인 것은 아니다. 거대담론이란 필연적으로 추상화를 동반하며, 삶의 모순적이면서도 미세한 국면을 단순화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는 것이니까. 그렇다고 거대담론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도 없다.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단기적인 이해관계로 괴로워하지만, 크게는 삶의 의미라고 할 수 있는 거시적인 전망이 없으면 또한 절망하는 존재다.

그것은 개인적 차원에서도 그러하지만, 국가적 차원이나 문명의 차원에서도 유사하게 작동하는 감정의 구조인 것이다. 특히 현재와 같이 지구적인 자본주의 자체가 구조 변동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거나, 문명 자체가 지속 불가능한 생태위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상황, 그리고 한국의 민주주의 자체가 붕괴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고양되고 있는 시점에서는, 큰 틀에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거대담론'이 요청되는 것이다.

최근 일군의 사회과학자들이 이른바 '한국사회 체제논쟁'을 벌이면서, 한국 자본주의의 성격과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시 사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나선 것은 그런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녹색평론'이 일찍부터 제기해 온 생태문명론이나 최근 '문화과학'에서 60호를 기념하여 다시 '즐거운 혁명'을 이야기하는 등의 시도는 그간 한국의 지식인사회에서 실종되었던 거대담론의 복원이 이 문명사적 전환기에 다시금 요청된다는 문제의식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문명사적 전환기라 말했는데, 그렇다면 오늘의 문명의 성격을 묻는 일도 빠질 수 없다. 그런 관점에서 일본의 사상가 모리오카 마사히로의 '무통문명'이란 개념은 오늘의 한국적 현실을 이해하는 데도 커다란 시사점을 주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괴로움과 아픔이 없는 문명이 인류의 이상이었는데, 이런 이상에 근접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오늘의 무통문명이라고 말한다.

물론 오늘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괴로움과 고통이 더 넘쳐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실제로 그것은 사실처럼 보인다. 문제는 각각의 개인들이 그러한 괴로움과 고통을 적극적으로 회피하는 데 골몰하고 있고, 기술유토피아주의가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의 고통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 모리오카의 주장이다.

오늘날 인간들은 적절한 수준에서 욕망을 관리당하고 있으며,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문명의 시스템에 자발적으로 속박당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인간은 먹을 것과 안정·쾌락을 공급해주는 사회시스템과 자발적인 속박관계를 맺으려는 듯 보이는데, 사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자기가축화'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가 무통문명의 작동원칙으로 일컫는 다섯 가지 기제는 사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처세술이다. (1)쾌락을 찾고 고통을 피한다. (2)현상유지와 안정을 추구한다. (3)틈새가 보이면 욕망을 확대 증식한다. (4)타인을 희생양으로 삼는다. (5)인생·생명·자연을 관리한다와 같은 원칙들은 사실 우리들의 일상에 이미 미만해 있는 태도인 것이다.

오늘의 많은 수의 한국인들은 미디어는 물론 삶의 현장에서 증폭되고 있는 사회적 고통의 실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용산참사와 비정규직 문제와 민주주의의 몰락과 4대 강 개발이 자연에 가할 재앙적 미래와 언론자유의 붕괴와 교육의 종말 등의 문제를 생각하며, 이대로 세상이 굴러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인식'이 '행동'을 끌어내지는 않는다. 철학자 지젝은 '냉소적 주체'라는 개념을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나도 그게 문제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래서 어쩌라구?" 이런 냉소적 주체들이야말로 모리오카 식으로 말하면 가축화된 존재들이다. 이런 가축화된 존재들은 자신의 고통은 물론이고 타인의 고통마저도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방식을 통해, 결과적으로는 식인(食人)사회를 용인한다. 타인을 희생양으로 만들면서 안심하는 사회, 그게 지금 한국사회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문학평론가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尹, 부·울·경 지지율 하락세…與 텃밭민심 요동 총선 비상
  2. 2‘글로벌 허브 도시’ 부산의 신성장동력으로
  3. 3텃밭·무주공산으로 몰리는 후보군…부산 지역구 양극화
  4. 4부산기업 해외출장업무 느는데…김해 노선 없어 셋 중 둘 인천행
  5. 5준공영제 외곽 노선 넓히고, BRT 도심 통행속도 높이고
  6. 6따뜻한 겨울…11일 천둥·번개에 많은 비
  7. 7낙동강 철새 대체서식지 후보가 ‘비닐하우스 섬’?
  8. 8‘의사 복서’ 서려경, 태국 선수에 TKO승
  9. 9금융·비즈니스·관광 국제화 핵심…‘두바이 수준’ 규제 없애야
  10. 10연말 술자리 부담스럽네…부산 맥주·소주 가격 상승세(종합)
  1. 1尹, 부·울·경 지지율 하락세…與 텃밭민심 요동 총선 비상
  2. 2‘글로벌 허브 도시’ 부산의 신성장동력으로
  3. 3텃밭·무주공산으로 몰리는 후보군…부산 지역구 양극화
  4. 4혁신위 11일 종료…부산 與 “김기현 책임져야” vs “총선 전 사퇴 안돼”
  5. 5北 돈줄 막자…한미일 ‘대북 新이니셔티브’ 추진(종합)
  6. 674일 만에 끝난 사법부 공백 사태…조희대, 재판지연 문제 등 시험대
  7. 7이낙연, 신당 창당 가속화 하나? …“이준석, 시기 되면 만나겠다”
  8. 8윤 대통령 "반도체는 한-네덜란드 협력의 중심축"
  9. 9野 병립형 회귀 '현실론'과 맞붙은'명분론'…원심력 커지나
  10. 1012월 임시국회 시작되지만…예산·청문회에 특검·국조논란 등 여야 대치 고조
  1. 1연말 술자리 부담스럽네…부산 맥주·소주 가격 상승세(종합)
  2. 2“블록체인 규제 철폐·에어부산 분리매각…대통령 의지 중요”
  3. 3고군분투 중소기업 57% “내년 경영 올해만큼 힘들 것”
  4. 4대성문 ‘시청 아틀리에 933’ 분양
  5. 5은행권, 자영업·소상공인 최대 150만 원 환급 추진
  6. 6노후산단 개발 규제 푼다…절차·용도변경 간소화(종합)
  7. 7스타소상공인 지원금 큰 힘 됐어요
  8. 8세계 해양 대통령 임기택 총장 퇴임
  9. 9한국해양진흥공사, 여성해기사 승선지원키트 전달
  10. 1050인 미만 사업장 94% "중대재해처벌법 준비 안돼"
  1. 1부산기업 해외출장업무 느는데…김해 노선 없어 셋 중 둘 인천행
  2. 2준공영제 외곽 노선 넓히고, BRT 도심 통행속도 높이고
  3. 3따뜻한 겨울…11일 천둥·번개에 많은 비
  4. 4낙동강 철새 대체서식지 후보가 ‘비닐하우스 섬’?
  5. 5금융·비즈니스·관광 국제화 핵심…‘두바이 수준’ 규제 없애야
  6. 6인니 150개 부산신발업체 공장 있는데…직항 없는 김해공항
  7. 7오늘의 날씨- 2023년 12월 11일
  8. 8이익만 좇고 의로움 잊었다…‘견리망의(見利忘義)’ 올해 사자성어
  9. 9지지부진 창원 덕산산단…부지공급가 낮춰 돌파구 찾는다
  10. 10마산로봇랜드 수사 결과 2월께 나올 듯
  1. 1‘의사 복서’ 서려경, 태국 선수에 TKO승
  2. 2정보명호 아시아야구선수권 3위
  3. 39200억 다저스맨 오타니, 내년 서울서 김하성과 대결
  4. 4아이파크 통한의 역전패…4년 만의 1부 승격 불발
  5. 5황인범 세르비아 데뷔골…복귀한 김민재는 혹평
  6. 6두산 포수 박유연, 음주운전 적발 숨겼다 들통…구단 중징계 예상
  7. 7부산 아이파크 통한의 역전패…수원FC에 2차전 패배로 승강 불발
  8. 8수원FC 5-2 부산 아이파크…부산 1부 리그 승격 불발
  9. 9비기기만 해도 1부 승격…아이파크 한걸음 남았다
  10. 10물 오른 손흥민·황희찬, 불 붙은 EPL 득점왕 경쟁
우리은행
강동진의 도시이야기 [전체보기]
세계유산에 대한 오해 풀기
‘싱가포르다움’을 위한 그들의 선택
과학에세이 [전체보기]
수학의 점과 물리의 점
아무도 모르는 카르텔에 갇힌 韓 R&D 투자 철학
국제칼럼 [전체보기]
‘지식 콘텐츠 챌린지’에 도전하기
기고 [전체보기]
대전환의 시대, 북극 협력 새로운 길 모색하다
잊고 지냈던 나림 선생과의 재회…깊고 넓은 숲의 울림이 찾아왔다
기자수첩 [전체보기]
김해외국인노동자센터 예산삭감 재고를
교권회복 시킨다더니…교육부, 교사 집단연가에 으름장
김갑수의 생각 [전체보기]
이재명 대표께
꼰대세상
김석환의 이미 도착한 미래 [전체보기]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은 안고 죽는다
‘달’ 대신 ‘손가락’만 보세요
김용석의 시사탐방 [전체보기]
연례행사 노벨상에 유감 있다면
양말 뒤집어 신기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전통음악 교육 활성화를 기대하며
예술과 공간이 만난 신개념 방중악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2035 재도전 합리적 검토를
노인을 위한 공연장은 없다
도청도설 [전체보기]
오타니의 만화야구
무자녀 세금
박상현의 끼니 [전체보기]
밤과 몽블랑
참새구이와 어묵
사설 [전체보기]
독감·폐렴·코로나 ‘3재’ 개인위생 준수로 이겨내자
‘불수능’에서 드러난 “사교육 없애겠다” 허망한 다짐
세상읽기 [전체보기]
축제 도시 부산을 위하여
부산 해사법원 설치 더는 미룰 수 없다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복지국가 정치가 절실한 이유
실손의료보험 청구간소화와 의료민영화
이해인 수녀 '기도의 창가에서' [전체보기]
저무는 11월에 - 턴 투워드 부산
환대에 대한 생각들
이홍의 세상현미경 [전체보기]
독일을 보면서 곱씹어보는 교훈
골짜기 세대
인문학 칼럼 [전체보기]
중세 고려의 소와 소고기
사라진 낙동강 뱃길
장병윤의 대안 모색 [전체보기]
오! 홍범도
야만의 과학
전호환의 두잉세상 [전체보기]
펫팸족과 신성장동력 펫코노미
베로나 아레나 오페라 페스티벌
차재원의 정치평설 [전체보기]
진짜 ‘영남 스타’가 되려면
잼버리 파행을 부산엑스포 전화위복으로!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처음이란 무엇인가? 조지아 와인
사랑의 묘약, 와인
특별기고 [전체보기]
부산의 위대한 도전은 계속 된다
수산업 몰락 재촉하는 후쿠시마 방사능 선동
하순봉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미니멀 음악
12음기법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도상봉의 격조 있는 ‘달 항아리’
윤재 이규옥의 ‘고진감래’
CEO 칼럼 [전체보기]
호모 프롬프트 시대와 부산 MICE 산업
스타트업정신으로 무장한 창업가들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
스토리 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