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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실사구시(實事求是) /신명호

뒤숭숭한 세상일수록 감성적 논쟁보다 현실적 대안 필요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4-28 19:29:51
  •  |   본지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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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월탄 박종화는 주로 시인으로 활약했다. 스물두 살의 마지막 밤.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그는 지난 세월을 반성하는 시를 썼다. (전략) 나는 말이 많았네./일 보다 고담준론이 많았네./남을 돕기 전에 나 혼자만 잘 살랴 했네./질서를 지키지 아니하는 시비 박탈의 민주주의만 배웠네./수박 겉핥기로 배웠네./거문고를 타면 외줄만 타고/협화음을 낼 줄 몰랐네./바둑을 두면 패를 써서 따먹을 줄만 알고/전체를 살려 낼 줄 몰랐네./그 뿐이었나./거짓말을 잘 했네./앞에 가는 사람을 짓밟아 쓰러트렸네./편하게만 살면서/하느님께 복만 달라 했네./일은 하지 아니하고 입으로만 살았네./이것이 스물 두 해 동안/나의 지나간 역사였네./(하략) 박종화는 시의 제목을 실사구시(實事求是)라 하였다. 지난 세월 자신의 삶이 허위로 가득했음을 고백하며 앞으로는 실사구시의 자세로 살겠다는 다짐에서였다.

실사구시라는 말은 '한서'에 처음 등장한다. 전한 제6대 황제 경제에게는 1명의 적자와 13명의 서자가 있었다. 13명의 서자 중 한 명이 하간왕이었다. 공부를 좋아한 하간왕은 고서를 고증할 때 반드시 그 진면목을 추구하였다. 방법은 관념적인 고담준론이 아니라 현실적인 생활과 실천을 통해서였다. 그 같은 하간왕의 공부 방법을 당시 사람들이 실사구시라고 불렀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주류사상은 성리학이었다.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성리학은 분명 심오한 철학이었다. 그렇기에 조선시대 성리논쟁은 자칫 관념적인 고담준론과 공리공담으로 빠지기 쉬웠다. 조선에서는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오랑캐로 생각하는 북벌론이 횡행하였다. 북벌론은 오랑캐 청나라에 대한 우리 민족의 우월성 그리고 멸망한 명나라에 대한 우리 민족의 의리를 강조함으로써 상처받은 민족감정을 한껏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그 위로는 비현실에 입각해 있었다. 중국대륙을 제패한 청나라는 군사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면에서도 세계적인 강국이었다. 그런 청나라를 오랑캐시하는 북벌론은 아무래도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지 못하였고 그래서 관념적인 고담준론과 공리공담으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관념적인 고담준론과 공리공담이 거세질수록 논쟁자체는 번성했지만 현실은 피폐해졌다. 이런 상황에 반기를 든 지식인들이 이른바 북학파를 위시한 실학자들이었다. 북학파는 북벌론과는 반대로 청나라의 존재를 인정하고 배우자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현실을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입장에서 실사구시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조선후기의 주류 사상은 여전히 북벌론이었다. 현실을 현실로 인정해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입장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추사 김정희는 이런 현실을 개탄하며 '실사구시설'이라는 논설을 지었다. 추사 김정희는 "무릇 성현의 도는 몸소 실천하면서 공리공담을 숭상하지 않는 데 있다. 그러므로 사실을 강구하고 허위를 버려야 한다. 만약 성현의 도를 아득한 허공 속에서 찾고자 한다면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본래의 뜻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비록 성현의 도가 심오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떠난 아득한 허공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성현의 도는 심오하면 할수록 도리어 현실적인 생활과 실천 속에서 살아 숨 쉬어야 한다. 심오한 성현의 도를 높이겠다는 사명감으로 아득한 허공 속에 그 도를 세우려 하다가는 거꾸로 성현의 도 자체를 잃어버리게 됨으로써 성현의 역적이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동양의 학문 전통에서 볼 때 실사구시는 '뜨거운 가슴'만 있는 지식인들에게 '상식적인 머리'도 필요함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뜨거운 가슴'만으로 현실을 보면 현실은 인정되기보다 부정되기 십상이다. '뜨거운 가슴'들이 제시하는 뜨거운 대안들은 뜨겁게 논쟁하고 갈등하기 쉽다. 그래서 월탄 박종화의 고백대로 '나는 말이 많았네./일 보다 고담준론이 많았네.' 하기 쉽다. 더 큰 문제는 현실을 현실로 보는 눈마저도 멀게 함으로써 현실을 개혁할 현실적인 대안들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현실이 어지럽고 뒤숭숭할수록 도리어 현실을 현실로 볼 줄 아는 '상식적인 머리' 즉 실사구시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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