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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침묵으로 존재하는 것들 /김수우

능란한 말보다 어눌함이 오히려 소박한 소통이 된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5-14 20:22:02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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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낡은 의자에 닿은 햇빛도 샘물처럼 맑다. 퐁당퐁당 잎새에 뛰노는 바람도 유난히 푸릿하다. 고마운 사람들을 차례로 기억한다는 의미에서 오월은 더 싱그러운 달임에 틀림없다. 노동자의 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석가탄신일 등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이 많은 한 달이다. 자연 듣기 좋은 말들이 넘치는 달이라고 할까. 선거까지 앞두고 있으니 말잔치는 그야말로 사태를 이룬다. 자기표현의 시대인 데다 달변과 재치가 우선적 능력이 되어버린 현실이 아닌가.

하나 그 매끄러운 말들은 표면적일 때가 많다. 매일 다섯 종류의 신문을 배달받는다. 새 정보를 담은 메일이 수십 통씩 종일 도착한다. 보이는 현상, 들리는 소문에 잠식되는 내 영혼이 그대로 느껴진다. 하지만 아침저녁으로 내게 닿는, 현상으로 드러나지 않는 어떤 존재들이 있음도 감지해야 하지 않을까. 마치 넋과 같은 것들, 바람 같은 그것들은 삶의 가장 깊은 데서 걸어나오는 것이기에 말이다.

기어(綺語)는 비단 같이 반지르르한 말이다.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 도리에 어긋나는 묘하게 잘 꾸민 말. 잡예어(雜穢語), 무의어(無義語)가 그 사전적 정의이다. 듣기 좋게 꾸미는 말, 매끄러운 말, 자신을 합리적으로 치장한 말, 그리고 농지거리들이 우리 대화를 구성하고 있는 세태이다. 말이 많으면 본의를 빗나가거나 실수하기 쉽고, 정도가 지나치면 남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결국 상처받는다.

불교의 십악 가운데서 언어 금계 조항이 네 개나 된다. 망어(妄語) 악구(惡口) 양설(兩舌) 기어(綺語). 구시화문(口是禍門)이라는 말도 있거니와 기어(綺語)를 많이 쓴 사람은 무간지옥에 간다고 한다. 법구경은 사람은 입안에 도끼를 갖고 태어난다며 구업을 경계시키고, 성경에서도 혀에 파수꾼을 세우라고 이른다. 그러고 보면 하루종일 내뱉는 내 말은 매 순간 얼마나 아슬아슬한 것일까. 지나치지 않는 말이 간절하다.

앎은 실천이 중요하듯, 말 또한 행동이 절대적이다. 내가 매일 보는 달력 중에 열사력이 있다. 이 땅의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의 이름이 담긴 달력이다. 오월엔 그 이름이 다른 달보다 두 배 이상 많다. 밀알로 썩은 영혼들, 전체적 삶을 위해 거름이 된 사람들이다. 추모할 만한 이름이 그만큼이라면 기억되지 못한, 숨은 희생과 억울한 혼은 얼마나 무수할 것인가.

그들은 침묵으로 존재한다. 우리 곁에 묵묵히 서 있다. 보이지 않으면 아득히 잊어버리는 게 우리 정서이다. 아니 눈앞에 있는 것도 치매성 환자처럼 인지하지 못하고 자주 잃어버린다. 본래적 자연도 제 자신조차도 말이다. 쏟아지는 반들반들한 말에 갇혀 자꾸 미끄러지는 것이다. 침묵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잊지 말자. 오월 햇살 속에 잠긴 그들의 침묵이 오히려 예언처럼 다가온다. 말도 행동도 함부로 펄럭이는 플래카드가 아니라, 사막을 넘는 낙타처럼 절실하고 치열하고 끈기 있는 걸음이어야 하리라.

감사도 넘치고, 아픔도 깊으니 이래저래 오월은 뜨겁다. 진정한 앎은 깊이를 만든다. 진정한 사랑도 깊이를 만든다. 그 깊이의 특징이 침묵이다. 침묵은 상처를 아물게 하는 가려움 같은 원천적인 치유력이다. 어떤 이질적인 것도 조화시키는 힘과 동시에 새로운 의미의 충돌과 탄생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는 자신의 성찰과 공부에 다름 아니며, 사랑의 방식에 다름 아니다.

나는 '訥'자를 좋아한다. 어눌할 '눌'자이다. 말이 안에 있다는 뜻이다. 안에 있는 것들은 그리 능률적일 수 없다. 능란한 말보다 그런 어눌함이 오히려 소박한 소통이 된다고 믿는다. 서로에게 넘치는 마음이 번지르르한 말이 아니었음 좋겠다. 서로서로 체온으로 눈빛으로 교감하는 부드러운 촉수였으면 좋겠다. 손등을 어루만지고, 찻물을 따르며, 눈빛 마주치는 고요가 그립다. 말을 줄이되 귀를 더 열고, 눈을 크게 뜨고, 뒤도 한 번 돌아볼 일이다. 인도철학자의 한 잠언처럼 다이아몬드의 영혼이 광휘라면, 영혼의 영혼은 사랑이다. 결국 다시 사랑의 문제인 걸까. 침묵으로 존재하는 저들. 묵묵함의 찬란함을 본다. 진정한 존재감은 껍질이 아닌, 내면의 물관을 감지하는 일에 있으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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