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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기억하나요, 긍지라는 당신의 날개 /김수우

근대적 개발논리로 얻는 게 무엇인가

공존과 상생이 시대적 요청이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8-13 19:48:38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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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지인을 찾아 잠시 한 산골에 들렀다. 마을 앞 오백여 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먼저 반겨주었다. 그 둥구나무는 아직도 울울창창 우듬지 끝의 작은 잎새들까지 푸른 기운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한 그루 우주목처럼 생명의 근원을 떠올리게 하는 그를 보는 순간 제일 먼저 다가오는 게 '긍지'라는 단어였다.

대지를 달구는 한여름 햇살을 최선으로 받아 제 몸 여무는 들판을 바라보면 마음이 그냥 너그러워진다. 그 생명의 긍지들이 눈부시다. 어찌 그 들판뿐이겠는가. 여기저기 옹이 불거진 나무 둥치의 긍지는 도심 속 보도블록 틈새에 피어난 풀꽃에게서도 꿋꿋하게 빛난다. 하늘 찌르는 매미울음, 오래 돌보지 못한 화분에서 마침내 피어난 붉은 꽃송이, 흠집 많은 낡은 자전거, 깜박깜박 밤바다를 비추는 등대에서도 성실한 긍지를 본다. 자연의 긍지는 인간의 정신을 더 풍요롭게 또 경이롭게 한다.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긍지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소외와 불안으로 현대인의 정서는 점점 거칠어지고 있다. 긍지를 잃었음이다. 문명은 기실 노예적인 삶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착각과 오류에 빠진 소비자로 전락시키면서 말이다. 게다가 여기저기 함부로 막히는 강물, 함부로 파이고 있는 산자락은 스스로 존재 전체의 긍지를 시들게 한다. 게임에 열중하는 청소년들에게서 순수함의 긍지를 느끼기 어렵다. 게임문화보다 한심한 건 자본주의 매체에 함몰된 소비와 음주와 노래방 등 천편일률적인 어른들의 오락문화이다.

그보다 더 속수무책인 건 자연을 깨뜨리는 개발논리의 오류에 빠진 경제관념이다. 경쟁보다는 공존이 더 지혜로운 생존방식이며, 이제 상생의 원리를 익혀야 하는 게 시대적인 요청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근대적인 개발논리에 매달려 있다니. 잃는 게 무엇이며 얻는 게 무엇인가. 자연에 감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긍지는 자만일 뿐이다. 이 자만은 늘 물질에 대한 비굴로 굴절되지 않던가.

긍지는 우리 안의 숨은 날개이다. 자신의 능력을 믿는 당당함이란 사랑을 예감하는 어떤 원초적 힘이어야 한다. 그 믿음은 가치를 선택하는 믿음이며, 타자에 대한 믿음이어야 한다. 진실을 추구할 때, 거짓이 없을 때, 책임감을 가질 때 잠재된 긍지들이 잎을 틔운다. 긍지는 자존심에 다름 아니며, 용기에 다름 아니다. 삶에 용기를 주는 것은 순수함이다.

이 순수한 용기는 영적인 자기 확인을 필요로 한다. 긍지는 현실의 가장 깊은 데서부터, 영혼의 뒷면에서부터 울려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숨은 내공에서 발휘되는 이 긍지는 어쩌면 끊임없이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정신적인 항상성(homeostasis)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설계된 생명체 자체의 자연기능 말이다. 더욱 혼란한 상태로 되려는 경향을 가진 무질서한 세계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정돈되고 조화를 이루려는 힘이 생명의 특성이 아닌가.

개세공로당불득일개긍자(蓋世功勞當不得一個矜字). 마음을 멈추게 한 채근담의 한 페이지이다. 세상을 뒤덮는 공로도 마음속에 있는 하나의 긍지를 당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는 한 개체이지만 분명한 사회적 존재인 인간이 어디서 진정한 존재감을 획득하는지 강조한다. 사람들은 세상이 인정할 만한 커다란 부와 그럴듯한 명예에만 집착하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건 내면의 긍지로 빛나는 사소하고 소박한 일상인 것이다.

강을 지키고자 한 문수스님이나 함안보에서 고공농성했던 이들은 스스로 마음의 긍지를 택한 영혼들이 아닐까. 이제 긍지는 타자를 향한 겸허한 힘이어야 하는 것이다. 자연을 향한 우리의 근심, 양심과 부끄러움이 오히려 우리를 푸르게 하는 긍지이리라. 문득 하늘을 환기한다. 긍지라는 날개를 갖고 싶다. 나 한 사람이 그 어떤 둥구나무보다 오래된, 수천 수만 년 생명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한 그루 우주목임을 상기하고 싶다. 우듬지의 푸른 잎새처럼, 내 본래의 깃털 한 잎 한 잎 온 힘으로 흔들고 싶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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