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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문주란 선생 /이상섭

개화까지 2~3년… 기다림의 꽃 통해 인내심 잃었던 인생 다시 배워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9-03 21:06:39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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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포 전이었다. 골목에서 횡재를 했다. 그러니까 피부과에 들러 진료를 끝내고 나오던 길이었다. 당시 나는 '왕짜증'으로 머리에 스팀이 '만땅'인 상태였다. 병원이 인근의 유명세를 탄 탓인지 환자가 '줄대령'이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대기실 의자에 앉아 '공상질'을 하다가, 눈 감고 졸다가, 손바닥의 건선 수포를 보다가, 쓰다듬다가, 일없이 벽시계 '불알'을 훔쳐보다가, 화장실에 직행해 요의도 없는 내 거시기도 꺼내봤다가, 다시 앉아서 TV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가, 주위 환자들은 어떤 이유로 왔나 싶어 드러난 피부를 요모조모 뜯어보다가, 혹시 접수에 누락은 안 된 건지 확인까지 했다가, 그래도 차례가 안 와서 그냥 가버릴까 하다가, 거의 미주알이 쫄밋거려 환장할 쯤에야 내 차례가 왔다. 헌데, 30초 만에 진료가 땡이라니!

방전된 기분으로 털레털레 골목을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꽃향내가 후각을 자극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보이는 거라곤 멍게가 든 수족관과 횟집 앞 재생대야에 심어진 라일락이 전부였다. 라일락이야 봄에 꽃이 피니 임자일 턱이 없고, 물속에 있는 멍게가 수족관을 기어올라 독특한 향으로 나를 유혹했을 리도 없었다. 그 바람에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 못 가서 망할 놈의 향기가 또 발목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기어코 범인을 찾아내고 말리라 싶어 이리저리 눈망울을 뒤룩거렸다. 그러다가 으슥한 복덕방 앞에 하얀 꽃을 피운 화분이 눈에 걸렸다. 옳지, 저놈이 내 발목에 태클을 건 주인공이구먼. 나는 지금 당장 '민증이라도 까라'고 윽박지를 기세로 다가갔다.

녀석의 생김새가 좀 특이했다. 나무처럼 큰 둥치에, 잎은 또 춘란처럼 가는 게 아닌가. 게다가 하얀 꽃숭어리가 마치 파꽃처럼 뭉쳐져 솟았는데 한두 대가 아니었다. 이런 화초는 내 지구경험상 본 적이 없었다. 화분 주위를 맴도는 나를 안주인 노파가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향이 좋쥬? 요놈을 실내에 두면 향기가 집 안을 가득 채워요, 독하지도 않고 말간 게 괜히 사람 기분을 좋게 한다니까. 근데, 젊은 양반이 꽃을 '디게' 좋아하나 보네?" "아, 예. 실은 아내가 좋아해서 그냥 몇 그루 키우는 중입니다만." 내가 대꾸하자 노파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이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우리 집에 온 지가 수십 년짼데, 자식들은 품을 떠나보내도 요놈만큼은 품고 지내는 중이라우." 내가 성급하게 되묻고 나섰다. "혹시, 이 녀석 이름 좀 알 수 없나요?" 노파는 누가 엿듣기라도 하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글쎄, 요놈이 바로 그 유명한 문주란이라우" "예?" 나도 모르게 입이 떠억 벌어지고 말았다. 세상에, 말로만 듣던 제주도 천연기념물 문주란이라니! 그 귀하신 양반이 어떻게 여기까지 납신 걸까. 내가 눈빛을 파닥이자 노파는 한술 더 떠서 모종삽을 찾아 쥐는 게 아닌가. 잠시 뒤, "요놈의 씨를 내가 화분에 여러 개 심었는데 이삼 년이 지나 겨우 요거 하나만 싹을 틔웠네, 그러니까 잘 키워 보슈" 하면서 봉지에 화분의 흙까지 채워 건네는 게 아닌가.

목에 근육이 생기도록 고마움을 표한 후, 나는 냅다 꽃집으로 달렸다. 귀하신 몸이라니 좋은 흙에, 맛깔스런 화분까지 얼른 마련해주고 싶어서였다. 꽃집 주인도 문주란을 보고선 어디서 구했냐며 묻고 들었다. 하지만 아직 비밀을 발설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대꾸 대신 피식 웃음만 물었다. 하지만 문주란 화분을 들고 꽃집을 나설 때에는 나도 모르게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자랑질'을 하고 말았다.

그렇게 문주란을 분양받은 후, 나는 매일 베란다의 녀석을 살피며 지내는 중이다. 녀석이 하루가 다르게 자세를 고쳐 잡는다 싶더니, 이제는 새순마저 디밀고 있다. 이렇게 자란다면 조만간 꽃도 볼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불현듯 할머니 말이 떠오른다. "꽃을 피우려면 몇 년은 족히 끈기 있게 보살펴야 할 거우, 문주란은 기다림의 꽃이니까." 그때 할머니는 내게서 조급함을 읽은 것일까. 그깟 대기시간을 참다못해 미주알을 쫄밋거리며 투덜댔냐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여유. 어쩌면 나처럼 사람들도 인내심을 잃고 있는지 모른다. 약만 먹으면 재깍 낫기를 바라고, 무슨 일을 해도 당장 결과를 얻기 위해 발버둥을 치면서. 그런 면에서 나는 지금 문주란을 통해 인생을 다시 배우는 셈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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