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한반도의 구한말 시대와 현재 상황 비교 분석'이라는 연구를 한 적이 있다. 탈냉전 후 국제정세 변화가 100년 전 조선이 처한 상황과 유사하다는 세간의 인식을 따져 보자는 시도였다. 대립적 냉전 구도가 해체된 뒤 주변 4국이 각개 약진하기 시작한 정세에서 우리가 보다 복합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게 당시 연구의 결론이었다.
북핵 문제가 20년 가까이 우리 외교의 중대 과제로 남아 있고 남북관계와 더불어 한미동맹의 조정, 한중 및 한러 협력 강화, 한일 간 현안 관리 등 외교안보 차원에서 큰 이슈들이 이어졌다.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크게 악화되면서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2010년 일련의 안보 위기는 21세기 한반도에서 과거와 같은 냉전적 질서가 재현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았다. 천안함 사건 이후 관망 자세를 보이던 중국은 국제공동조사단 조사 결과에 동의하지 않고 유엔 안보리의 제재 결의에 반대했으며, 미 항모전단의 서해 연합훈련 참가에 대해서도 결연한 거부 입장을 표명했다. 연평도 포격사건 때에도 사태의 본말이 명확한 상황에서 남북 모두에 대한 자제 요구와 6자회담 수석대표회담 제의 등을 통해 도발자를 비호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최근 중국이 보이는 태도는 2009년 중반 북한 정권과 김정은 후계체제를 옹호하기로 한 내부 결정에 따른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핵문제 악화를 감수하더라도 북한 체제를 유지하면서 서서히 개혁·개방하는 것이 장차 체제 급변이나 전쟁을 통해 반중국적 세력이 북한을 장악하지 못하게 하는 안전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입장은 러시아가 보이는 또다른 행보로 인해 의미가 확대되고 있다.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의 천안함 토의 때 유보적 태도를 보인 데 이어 12월 한국군의 연평도 사격훈련 계획에 대해서도 유엔 안보리를 긴급 소집해 저지하려고 했다.
저간의 상황에 비추어 지난 19일 워싱턴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상호관계를 강화하는 가운데 한반도 문제에 대해 협력해 나가기로 한 것은 뜻깊은 일이다. 양국 정상은 공동성명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협력하기로 하고, 남북관계의 개선이 중요하다는 점과 아울러 진정성 있고 건설적인 남북 대화가 필수적인 조치라는 데 합의했다. 또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해 9·19 공동성명 이행과 6자회담 프로세스 재개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로 하는 한편,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시했다.
미·중 정상간 합의가 나온 지 몇 시간 만에 북한은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전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상태를 해소할 데 대하여" 논의하기 위한 남북 고위급 군사회담을 제안했다. 지난 5일 정부·정당·단체 연합성명과 8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담화 등을 통한 북한의 대화 제의에 정부가 천안함 및 연평도 사건에 대한 사과와 책임 있는 조치, 그리고 비핵화의 진정성을 전제 조건으로 내세운 것을 고려한 제의였다.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고위급 군사회담을 위한 실무회담을 2월 11일에 갖자고 제안했다.
이번 남북 고위급 군사회담은 최근의 안보 위기를 벗어나 화해와 평화의 국면으로 진입하기 위한 절호의 계기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중국에 기대어 군사적 강수를 두던 북한이 모처럼 핵심 의제를 들고 대화에 나서는 것도 기회다. 한미동맹으로 북한을 강압하는 데 주력하던 미국도 적극적으로 대화를 주문하고 나섰다. 26일 방한한 미국무부 제임스 스타인버그 부장관 역시 한국의 대화 수락을 평가했다.
중국에서 일본, 러시아, 미국까지 차례차례 외세에 의존하려던 구한말 조선의 노력이 실패하고 결국 식민지의 나락에 빠진 교훈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제 제국주의 외교가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지만, 상호 대립과 줄서기가 아니라 동맹과 대외 협력, 그리고 남북관계의 안정적 관리라는 복합적 노력을 통해 전쟁을 피
하고 평화를 유지해야 하는 중차대한 시점에 우리는 서 있다.
전 청와대 안보정책수석
※사외 필자의 견해는 본지의 제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