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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식물성 남자와 동물성 여자 /김철권

과학적 증거가 진리의 척도인 양 대접받는 경쟁사회, 왠지 어깨가 무겁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1-02-06 20:04:11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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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성 남자가 있다. 한마디로 조용한 남자다. 세속적인 가치보다는 자기 내면의 완성을 꿈꾸는 사람이다. 그는 조용하고 은둔적이고 가능한 한 타인과의 경쟁을 피한다. 그래서 손해 보는 경우가 많다. 손해 보는 일을 당해도 조용히 속으로 삭이고 겉으로 분노를 표시하는 법은 거의 없다. 그는 사람들과 만나 어울려 놀기보다는 혼자서 지내기를 좋아한다. 술보다는 차 마시기를 더 좋아하고, 사람보다는 나무나 자연, 바람소리와 안개를 더 사랑한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매사에 무관심한 듯 초연해보이지만 마음은 늘 불안하기만 하다.

"이 경쟁적인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동물성 여자가 있다. 한마디로 생동감 있는 여자다. 내면의 가치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중시 여기는 사람이다. 많이 가지는 것과 많이 누리는 것, 그리고 사회적 지위에 성공의 가치를 둔다. 필요에 따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가능한 이익이 되는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려고 한다. 그녀는 항상 명랑하고 친절한 성격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잘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평판이 좋다. 삶에 뿌리를 내려 경쟁적이고 투쟁적으로 생활하기 때문에 손해 볼 짓은 거의 하지 않는다. 폼 잡는 것을 싫어하고 돈이 되지 않는 것을 경멸하며 매사 실용성과 합리성을 중시한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적극적이고 생활력이 강해보이지만 마음은 늘 불안하기만 하다.

"이 경쟁적인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식물성 남자와 동물성 여자가 결혼했다. 식물성 남자는 첫눈에 동물성 여자가 싫었지만 나이든 부모의 강요에 못 이겨 결혼했다. 그리고 결혼한 첫날부터 부부는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병신, 남자 구실도 못하는 것이, 내 인생을 망친 원수 같은 놈." 부인이 나를 찾아와 남편을 원망한다. 부부관계를 하지 않고 각방을 쓴 지가 너무 오래되어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한다. "아내가 너무 공격적이라 무섭습니다.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습니다." 남편이 하소연한다. "부모님만 돌아가시면 이혼하고 싶습니다. 그게 저의 유일한 바람입니다." 남편이 덧붙인다. "남자면, 가장이면, 책임감이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무능력해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요." 부인이 하소연한다. "착하면 뭐합니까? 지랄 같아도 능력 있는 남자가 좋아요." 부인이 남편의 가슴에 시퍼런 칼을 꽂는다. 그들 부부를 보면서 나는 이 시대에 잘못 태어난 죄를 생각한다. 이 살벌하고 경쟁적인 시대에 동물성 남자와 식물성 여자로 만났으면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을, 짝을 잘못 짓는 바람에 시대를 잘못 만나는 바람에 양쪽 삶이 모두 비참해져 버렸다.

내 어린 시절, 식물성 남자와 동물성 여자의 조합은 너무 흔해서 식물성 남자는 선비로 존중받고 동물성 여자는 그 선비를 먹여 살리는 악착같은 양처로 존경받았다. 세월이 변하여 이제는 식물성 남자는 무능력한 남자로, 동물성 여자는 탐욕스러운 여자로 각인되어 버렸다. 동물성 남자와 식물성 여자의 조합은 살아갈 수 있지만 반대로 식물성 남자와 동물성 여자의 조합은 살아가기 힘든 이 시대에, 문득 식물성은 인문학이고 동물성은 자연과학이 아닌가하는 쓸데없는 연상에 사로잡힌다.

사람이 비와 바람과 구름과 안개만 보고 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음식과 돈과 세속적 인정만으로도 살 수는 없다. 눈에 보이는 것과 손에 잡히는 것이 가장 중시되고, 합리성 실용성 과학적 증거라는 단어가 진리의 척도처럼 대접받는 사회에서 식물성 남자는 날이 갈수록 초췌해지고 메말라 간다. 철학자와 시인이 무능력자로 취급받는 사회는 이미 죽은 사회라고 확신하기에 그는 광인 취급을 받더라도 대낮에 사람들을 향해서 고함을 치고픈 심정이다. "어느 세상에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진리가 있더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식물성 남자가 소멸하면 동물성 여자 역시 생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나이를 먹어 갈수록 내 몸 안에 있는 식물성 남자와 동물성 여자 사이의 균형을 맞추기가 어려워진다. 동물성 사회에서 식물성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또는 살아남기 위해 입는 갑옷의 두께가 매년 두꺼워지는 느낌이다. 언제쯤 그 갑옷을 벗을 수 있으려나? 갑옷의 무게가 많이 무겁고 그래서 피곤하다.

동아대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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