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를 뚫고 거대한 인파가 모였다. 그들의 마음을 움직인 이는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타워크레인 위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다. 그는 날선 바닷바람이 살갗을 찢는 혹한의 계절에 그곳에 올라 볕이 작열하고 폭우가 엄습하는 한여름이 되도록 꿋꿋하게 버텨내고 있다. 그 사이 그는 세상의 아픔을 앓고 치유하려는 이들의 상징이 됐다.

지난 주말엔 고공농성 185일째를 맞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 전국에서 185대의 희망버스에 나눠 탄 9000명이 부산을 찾았다. 그 중에는 정치인과 시민운동가, 해고노동자들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평범한 시민들이다. 서울에서 온 주부, 아버지와 함께 온 여고생,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동참했다. 그들은 크레인 위에서 한 여성 노동자가 보내온 절박한 호소에 감응한 우리의 이웃들이다.

일상에 쫓기던 평범한 생활인들이 왜 모여든 것일까. 어쩌면 그들은 김진숙을 위로하러 온 게 아니라 스스로 위로받기 위해 모인 것인지 모른다. 그들은 희망버스에 몸을 싣게 된 사정을 토해냈다. 어떤 이는 "한때는 정리해고자나 비정규직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언제부터 그것이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자본의 필요에 의해 한순간 해고될 수밖에 없는 절박한 현실은 일상이 됐다. 그래서 "자본권력의 남용으로 더 이상의 희생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털어놓는다.

한진중공업 사태가 노사 간 합의로 끝났는지는 모르지만 거기에 투영된 우리의 문제, 사회 전반에 깊숙하게 곪은 고질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김진숙이 서 있는 곳 또한 문제의 현장이다. 불공정한 사회의 어두운 자화상이다. 대통령까지 나서 '공정사회'를 기치로 내걸 정도로 우리 사회는 불공정한 게임에 의해 좌우돼 왔다. 공정의 깃발 아래서도 여전히 온갖 불공정과 편법이 난무한다. 재벌이 부를 독식하고 부와 협잡한 부패권력이 공동선을 훼손하기 일쑤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가진 자의 비리에는 관대하면서도 약자에게는 너무 가혹하다는 점이 상처를 크게 만들었다. 거대자본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중소기업도 골목상권도 초토화시키기에 망설이지 않는다. 그들은 권력과 한 통속이 돼 우리 사회의 기회와 부를 독식하며 공동체의 근본을 흔들고 있다. 이런 사회를 바라보는 불신과 불안이 외롭게 싸우는 김진숙에게로 발걸음을 떼게 했을 것이다.

그들은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가 정당성이 있는지부터 따진다. 한진중공업은 지난 10년간 5000억 원에 가까운 이익을 냈고 필리핀 수빅조선소에서 선박을 수주하고 있다. 하지만 영도조선소 수주물량이 바닥이 나 정리해고가 불가피하다고 한다. 그래서 지난 2월엔 170명을 해고하고 230명을 희망퇴직시켰다. 그리고 주주들에게 174억 원을 배당했다. 영도 출신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정리해고의 근거가 희박하다고 쓴소리를 했다. 그는 "400명이나 되는 노동자를 거리로 내몰았는데도 사주와 경영진은 일거리가 없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한다"며 "수주물량을 확보하지 못한 것은 노동자의 책임이 아니다. 사주와 경영자가 져야 할 책임을 노동자에게 떠넘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금융위기 이후 국민들은 고통을 분담하면서 경제성장의 견인차가 돼 왔다. 최근엔 수출액이 사상 처음으로 1조 달러를 넘어섰다. 그런데 그 과실은 대체 누가 가져갔는가. 엄청난 부가 재벌의 곳간을 비좁게 하지만 국민들의 생활은 갈수록 고달프다. 이런 판에 정부는 부자감세를 강행하겠다고 한다. 재벌들은 정치권의 부자감세 철회 움직임을 포퓰리즘으로 매도하고 나섰다.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가 날로 가속화되는 게 현실이다. 벼랑으로 내몰린 국민들의 눈에 김진숙은 자신의 분노를 대신하는 '아바타'로 공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세계적 석학 노암 촘스키는 김진숙의 싸움과 9000여 명의 동조를 '경이로운 일'이라고 했다. 그 경이로움은 우리 사회의 건전한 회생을 이끄는 희망의 씨앗이 된다. 공권력의 폭압적 진압 속에서도 비장함보다 명랑함을 앞세운 그들의 몸짓은 '아름다운 연대'가 아닐 수 없다. 이제 그 연대의 힘으로 김진숙을 크레인에서 내려오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