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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가을이 깊어간다 /박남준

지리산 성삼재 산국, 자꾸 발길 멈추게 해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1-10-14 19:38:10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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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 기온 제법 쌀쌀, 늦게 심은 무 걱정돼 어서 쑥쑥 자라다오

구절초가 뜰 앞을 환하게 물들였다. 엊그제 지리산 성삼재 길을 넘다가 햇살처럼 피어나기 시작하는 산국과 노고단으로부터 바쁜 걸음을 재촉하며 내려오고 있는 붉고 노란 단풍의 숲이 자꾸 가던 발길을 멈추게 했다. 가을이 깊어 간다. 룰루랄라 파란 하늘을 걷는 발걸음이 휘파람을 불게 한다. 그러나 그 마음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금빛으로 고개 숙인 들녘에 추수하는 고맙고 뿌듯한 마음과 함께 줄어들지 않고 늘어만 가는 농촌 빚덩이와 힘든 경제로 인한 고통스러운 한숨이 희비를 엇가르며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당 한편 작은 텃밭에 뒤늦게 심은 어린 무들 앞에 앉아 중얼거린다. 언제 자라서 동치미를 담그나. 작년에도 늦게 심어서 애를 태웠는데 미안하다. 내 게으름 때문이다.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보름 가까이나 늦어 버렸지 뭐냐. 어쩌겠냐. 너희라도 힘을 내서 어서 쑥쑥 자라줘야지. 알고 있겠지. 내가 다른 곳에는 오줌을 누지 않고 오줌거름통에만 누고 있다는 것 말이야. 지금은 냄새도 많이 나지만 잘 삭으면 괜찮아. 기다려 곧 그 삭은 거름도 줄거야. 돌아다니다 다른 집들 밭에 제법 씨알이 굵게 자라서 아이들 팔목만한 무를 보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어린 무 곁에는 붉은 갓들이 따로 뿌리지 않았어도 싹이 나고 무성하게 잎을 키우고 있다. 그나마 위안이다. 붉은 갓들은 동치미를 담글 때 함께 넣어서 톡 쏘는 맛과 발그레한 색깔을 내는 첨가물로 쓸 것이다.

밤 기온이 제법 쌀쌀하다. 일주일에 한 번쯤 때던 불들을 이제 사흘에 한 번 꼴로 때고 있다. 작년에 해놓은 장작더미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슬슬 나무하러 가야겠다. 내가 나무 걱정을 하자 건너편 매계 마을 친구가 벌써 이야기 끝났단다. 작년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는 친구들과 산에 감벌을 하는 곳에 가서 나무를 해왔는데 올해는 아는 분이 수종 갱신을 한다고 이미 베어놓은 나무를 싣고 오기만 하면 된단다. 트럭만 빌려놓으면 된다고 한다. 엔진 톱으로 나무를 베어 쓰러트린다. 굵은 나무 몸통들을 토막토막 자르고 낫으로 잔가지들을 친다. 산 아래 길가까지 몇 번이고 굴러 내리거나 들어 던진다. 그렇게 해서 트럭에 싣기까지 입안이 버썩버썩 마르기까지 했는데 올해는 일이 좀 수월하겠다.

내가 사는 악양 동매마을은 올여름 꽤 심하게 수해가 났다. 길이 끊어지고 산사태가 났는데 그중 일부는 제일 마을 위쪽에 있는 우리 집 옆 마당을 쓸고 내려가기도 했다. 산사태가 나기 전날 밤 아무래도 위험하다며 건너 마을 옻칠공예가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서둘러 중요한 몇 가지만 가방에 챙겨 넣고 마당에서 기다리는 차를 타고 내려가는데 벌써 물이 길을 덮쳐 내리기 시작하고 있어서 차가 둥둥 뜨다시피 겨우 빠져나갔던 위험한 순간이 있었다. 밤새 뒤척거렸다. 말 그대로 야반도주를 하며 혼자 남겨 두고 온 빈집의 안부 때문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집으로 향했다. 마을 아래쪽은 흙과 굴러온 커다란 바위들로 작은 산이 하나 새로 생겨나 있었다. 집으로 올라가는 길이 아예 막혀 있어서 마을 뒤쪽으로 돌아 올라갔다. 다행히 집은 그대로 남아있는데 뒤뜰이 완전히 폐허로 변해 있었다. 연못이 흔적도 없이 메워져 큰 바위들로 덮여있고 올해 처음 주렁주렁 달려있던 사과나무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배나무는 반쯤 뿌리가 뽑혀 누워있었다. 방에 들어와 차를 마시려고 물을 틀었더니 물이 나오지 않는다. 산에서 내려오는 관이 끊어져 있다. 가스불도 들어오지 않아 가스를 다 썼나 확인해 보았더니 뒤안에 세워놓았던 가스통이 없다. 호스가 연결되어있던 쇠파이프관이 뚝 끊어져 있다.

아랫마을 어르신이 올라오셨다. 집 피해는 없느냐며 염려의 말씀을 건넨다. 저 아래쪽 밭 가운데 가스통이 떠 내려와 박혀있는데 혹시 이집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이리저리 물길을 피해 마을 아래쪽으로 내려가 보니 밭 한가운데 가스통이 묻혀있었다. 물이 다시 나오고 가스통을 수리해 밥을 짓고 길이 대충 차량이 드나들 수 있게 평탄작업이 되기까지 건너 마을에 가서 있었다. 아직 동매마을은 길도, 난리가 난 개울도 복구되지 않았다. 집 위쪽 개울에 쌓인 돌무더기가 언제 덮칠까 꿈자리가 사납다. 큰비가 오면 도망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어찌 우리 동네뿐일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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