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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나는 영도폐인이다 /강영조

지금은 사라진 옛 부산의 모습 고스란히 남은 생활사 박물관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1-12-21 20:41:44
  •  |   본지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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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석고황(泉石膏肓)이라는 말이 있다. 샘 천, 돌 석. 물과 돌이라는 뜻인데 자연산수, 정원 등을 일컫는 말이다. 고황은 심장과 횡격막 부위를 가리키는데 여기까지 병이 퍼지면 살아나기 힘들다고 해서 매우 고치기 힘든 고질병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산수유람, 정원 즐기는 것이 고질병처럼 된 상태를 이른다. 벼슬에 나가지 않은 옛 선비들이 당신들의 은둔 생활을 그렇게 표현했다. 나도 고질병에 걸려 있는 것이 있다. 얼마 전부터 영도라는 섬에 완전히 빠져 있다.

내가 영도에 자주 들락거리게 된 것은 부산항의 경관을 연구하면서다. 흔히 부산항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으로 민주공원에서 산복도로로 내려오는 부분을 가리킨다. 실은 그곳보다는 영도가 더 좋다. 산복도로에서는 부산항이 시가지와 해면 사이에 놓여 있어서 항만 시설을 뒤에서 훔쳐보는 형국이지만 영도에서는 수정산 그 산자락에 자리 잡은 시가지를 당당히 배경으로 거느린 부산항과 대면하듯 볼 수 있다. 영도의 중복도로를 마치 물방개처럼 쏘다니는 마을버스를 타면 그 차창 가득히 신선대 부두에서 남항의 풍경을 원 없이 감상할 수 있는 안복을 누리는 곳도 영도다. 또 잠시도 쉬지 않고 거울 같은 북항의 해면을 가르며 거대한 선박들이 나아가고 그 꼬리를 따라 'V'자로 퍼져나가던 흰 포말이 영도 해안으로 접안하는 풍경 또한 여기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일미다.

그 뿐 아니다. 영도는 이경(異境)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영도는 작은 제주다. 제주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을 풍문으로 듣고 있지만 그것을 실감하는 것은 영도의 먹을거리다. 영도는 부산의 어느 곳보다 물회를 즐겨 먹는 곳이다. 물회라면 제주다. 생선을 뼈째 썰어 육수에 풀어먹는 물회를 더운 여름에도 즐기는 곳은 부산에서는 아마 영도밖에 없을 것이다. 고갈산 할머니가 새벽잠이 많아서 그 때만 이사를 나간다는 설화는 설문대 할망이 한라산을 비우는 음력 2월에만 이사를 하는 제주 풍습과 흡사하다.

영도는 배와 관련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EBS 방송의 '극한직업'에도 몇 번이나 소개된 선박 수리공장이 바로 영도의 남항 지구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조선소인 조선중공업(1937년)도 영도에 세워졌다. 지금의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가 그곳이다. 그 조선소 공장 근처의 값싸고 맛있는 밥집도 영도의 명물이다. 몇 년 전 영도의 향토사가 김재승 교수와 3000원짜리 밥집에서 먹었던 저녁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키 낮은 유리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자 나무 탁자와 등받이 없는 긴 나무 의자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들은 말없이 의자를 당겨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는 주인이 내놓은 음식을 먹고 있었다. 밥집에 들어온 사람들은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인 듯 수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과거로 되돌아간 시간여행자가 된 듯한 느낌을 준 곳이었다.

점집도 그런 이경 중 하나다. 바다로 바라보고 서 있는 주택 여기저기에 점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신물이 바람에 흔들리는 광경에서 영도가 예사롭지 않은 장소라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는 뱃길을 나가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부산의 다른 곳에 비하여 점집이 많다고는 하는데, 진위는 차치하고라도 분명한 것은 불안한 미래에 대하여 속 시원히 밝은 미래를 속삭여 주는 정신적 카운슬러가 많이 있는 곳이라는 점은 틀림없다. 영도의 점집은 부산에서도 이름값을 하는 곳이 많이 있다는 것은 그 분야의 폐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이쯤 되면 영도에 점집 88개소 순례코스가 있으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것 있다면 일년 내내 적은 복채로 넉넉한 덕담과 지금보다 나은 내일을 얻으려 영도를 들락거릴 텐데.

이래저래 영도의 매력을 나열해보고 나서 새삼 알게 된 것이 있다. 아아, 그렇구나. 영도는 지금은 사라진 옛 부산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구나. 영도는 우리 부산의 원풍경을 간직한 생활사 박물관이구나. 그러니까 나는 골동을 어루만지듯 영도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었다. 골동의 매력에 푹 빠진 사람들을 골동폐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영도폐인이다.

동아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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