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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 /이택광

근대성 문제는 합리적 해결 안돼…각자 의견 펼치는 공론의 장 시급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2-01-25 19:45:36
  •  |   본지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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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독일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철학자 크리스토프 멘케는 근대 세계와 비극의 원리를 연결 짓는다. 멘케에게 비극은 근대성으로 인해 실현 불가능한 장르가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작동하는 필수적인 경험 형식이다. 이 경험 형식의 원리가 바로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멘케가 고전적인 오이디푸스 비극의 분석을 통해 법과 주체의 관계 문제를 밝혀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법이 처벌을 내리는 까닭은 교훈을 주기 위함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보여주는 것은 근본적으로 처벌의 고통을 통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범죄자를 처벌해서 교화한다는 법의 대의가 오이디푸스라는 원초적인 장면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자기처벌은 아무런 법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이 비극의 논리이다. 법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오이디푸스의 노력은 이렇게 실패한다. 이렇게 비극을 통해서 얻는 앎은 아이러니 자체이다. 이런 앎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행동에 대한 회의주의가 비극이라는 장르를 관통한다. 멘케는 이런 비극의 원리가 근대성의 조건으로 내재화되어 있다고 말한다. 경험을 통해서 앎을 구성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의 상황이 근대성이다. 따라서 근대성은 판단보다도 가치평가가 중심에 놓일 수밖에 없다.

가치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면, 자유주의적 다원주의를 채택할 수 있겠다. 이런 관점은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고 경쟁하게 하는 것이 이성적 해결책을 내놓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러니의 딜레마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하나의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수많은 가치와 의견들이 서로 공존하면서 맞부딪히는 혼란의 상황이 출현한다. 이 상황을 못 견디는 태도가 파시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근대성이 비극적인 아이러니를 본질로 한다는 멘케의 지적은 타당하다. 이런 맥락에서 수용해야 할 것은 근대성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망상을 버리는 것이다. 오히려 서로 충돌하는 가치들을 있는 그대로 둘 수 있는 관용의 태도가 필요하다. 이 관용은 분명히 자유주의적 규범인데, 지금 우리가 주장해야 할 것이 이 문제가 아닌가 싶다. 자유주의가 옳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와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하나의 조건으로 자유주의적인 틀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부러진 화살'이라는 영화를 두고 벌어지는 양상들은 한국 사회가 본격적으로 근대성의 아이러니에 봉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라는 진단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여기에 숨어 있다.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한국만 강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지금 '국민'이 품고 있는 불만을 단순한 감정 문제로 환원시킬 수 없다. 오히려 '국민'이 요구하는 것은 법을 폐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합리적인 법'을 정립하자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서 법을 좀 더 합리적으로 운용하지 못하는 책임을 사법부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 지금 상황이다. 그러나 법이라는 합리성은 결코 아이러니를 골자로 하는 근대 사회의 경험을 포괄할 수가 없다. 말하자면, 법제도와 국민의 규범 사이에 근본적인 괴리가 상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의는 언제나 특정한 세력의 정의일 수밖에 없고,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처벌은 언제나 합리적 근거를 제시하기 어렵다. 이런 이유로 민주주의 확장에 대한 정치적 요구가 필요한 것이다.

근대성의 아이러니를 인식하고 있는 이들은 준거점을 갖지 않는 행동 자체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이른바 '먹물'의 주저함이라고 비난하는 분위기가 이를테면 지금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다. 이런 아이러니를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의 제스처를 취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행동에 나설 경우, 필연적으로 드러나게 될 규범적 인식과 실천적 경험의 격차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행동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운명론을 펼칠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의견이 자유롭게 오가는 공론의 장을 만드는 것이 시급한 까닭이다.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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