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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아픔에 관하여 /이성희

타자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면 '나'는 그만큼 확장되는 것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2-02-01 20:06:59
  •  |   본지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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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에 의사 한 분과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건강 문제에 이르게 되었다. 그 의사는 일견 평범해 보이는 몇 마디를 말했는데 그 말이 나에게는 몹시 강한 인상을 주었다. 그것은 오랜 임상의 경험 속에서 체득한, 수월치 않은 깨달음임이 분명했다. 그의 말은 이러했다. 아픔은 왜 발생하는가? 그것은 대체로 두 가지 경우에 발생한다. 첫째는 내가 아닌 것이 내 속에 있을 때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내 것이 나로부터 떨어져 나갈 때이다.

나는 이 인상적인 통찰에 대해서 그 자리에서 뭔가 의문을 제기하려 했지만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뒤에도 자주 그 말을 곰곰이 되새겨보곤 했다. 의학과는 달리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에게는 이러한 말을 들을 때 곧장 몇 가지의 질문들이 꼬리를 물기 마련이다. 우선, '나'는 무엇인가?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나 아닌 것'인가? 아니 '나'란 것이 있기나 한 것인가? 등등.

'나의 자각'으로부터 서양 근대의 정신은 출발한다. 서양의 사상가들은 '나'와 '나 아닌 것'의 명확한 분별을 '나의 자각'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동양에 오면 얘기가 사뭇 달라진다. 동양의 위대한 정신들은 끊임없이 "나는 있다"는 우리의 소박한 믿음을 마구 흔들고는 기어코 "나는 없다"고 일갈하며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기 일쑤다.

불교의 무아(無我)나 장자의 상아(喪我·나를 잃어버림) 등이 그런 것이다. 이런 어렵고도 심각한 얘기들은 사실 좀 긴가민가하다. 그러나 실제로도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부터가 '나 아닌 것'인가를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학자는 우리 몸의 세포가 약 8조 개라면 우리 몸 안에는 그 열 배의 미생물, 즉 '나 아닌 것'인 타자가 산다고 한다. 이쯤이면 아무리 장안에 화제가 되는 '애정남'이라도 '나'와 '나 아닌 것'을 구분하기는 힘들 것이다.

앞서 그 의사의 아픔에 대한 통찰을 좀 삐딱하게 활용하여 '나'의 현실적 경계는 자극에 대해서 아픔을 유발하는 부분까지라고 정해보면 어떨까? 아픔의 한계가 '나'의 한계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내가 먼저 있어서 아픈 게 아니라 아픔을 통하여 비로소 '나'는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의사의 통찰은 이렇게 뒤집어볼 수 있겠다. 내가 아닌 것을 내가 받아들일 때, 그리고 내 것인 것을 나 아닌 것에게 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나'일 수 있는 것이다. 영화 '통증'에서 무통증 환자인 주인공은 한 여자('나'가 아닌 것)를 받아들여 가슴에 아픔을 느꼈을 때 그는 비로소 '나'를 살고 생명을 살았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나'란 것은 생각보다 작을 수도 있고 또한 훨씬 클 수도 있다. 나의 신체의 한 부분이라도 마비되어 아픔을 느낄 수 없다면 '나'는 그만큼 축소되는 것이다. 반대로 타자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면 '나'는 그 타자만큼 확장되는 것이다. 북송의 대학자 정명도(程明道)는 인(仁)이란 천지만물과 혼연히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고 독특하게 해석했다. 한의학에서 수족의 마비를 불인(不仁)이라고 한다. 마비되면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인(仁)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이고, 측은지심이란 아픔을 느끼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인자는 천지만물의 아픔을 느낌으로써 천지만물과 한 몸을 이루게 된다. '천수경'에서는 또 이렇게 말한다. "고요한 마음속에서 아파하는 마음이 일어난다(無爲心內起悲心)." 아파하는 마음은 가장 근원적인 우리들의 마음인 것이다.

최근 왕따로 괴로워하던 학생들이 연이어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 우리 사회에 충격을 주고 있다. 그러나 더욱 충격이었던 것은 급우들 대부분이 그 학생의 아픔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픔에 대한 무감각, 그것의 끝은 유감스럽게도 죽음이다. 우리는 주변의 타자들, 그리고 더 나아가 도롱뇽 한 마리, 들꽃 한 송이의 아픔에도 좀 더 예민해 져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 사회를 마비의 죽음이 아니라 감응의 생명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진정 '나'를 살 수 있게 한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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