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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들 /김수우

세상 새롭게 하는 건 결국 나의 눈뿐이라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도 나의 선택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2-04-06 20:38:15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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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어서원 앞에 있는 천리향을 누군가 뽑아갔다. 볼통해진 붉은 꽃망울을 하루하루 들여다보던 중이었다. 일순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다시 그조차 내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년 전 변두리 한 화원에서 사왔던 것이니, 그도 우리를 다녀간 인연이었을 뿐이다. 어디서든 꽃잎 틔우고 향기를 피우리라 믿어 마음을 내려놓는다.

인간이 위대해보이는 순간은 언제일까. 독서를 하면서 인간이 새삼 숭고하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지난 겨울 정민선생님의 '삶을 바꾼 만남'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정약용도 위대하고 그 스승을 끝까지 배운 황상의 삶도 위대하고, 그것을 이 시대에 조명해내는 학자도 위대하다. 공부를 한다는 것은 사람과 시간을 찾아내는 힘이 아니겠는가. 시공을 뛰어넘어 인연의 자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기적이 따로 없다. 그러한 인연의 결이 존재를 매력적으로 결정짓는 것이리라. 이러한 열정과 감동은 제자리, 본래를 지키는 삶이 만들어낸다. 생명의 뿌리를 이해할 때 커다란 우주목을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학자가 학자다울 때, 어른이 어른다울 때, 아이가 아이다울 때 일상은 위대한 힘을 발한다. 기적도 그런 것이리라. 제자리를 제대로 지킴으로써 기적이 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소박한 백성이 그렇고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 그렇다. 자기 자리에서 큰 생각을 하는 사람들, 독서는 그들과 끊임없이 마주 앉는 긴 의자였다.

기적이란 언제나 우연이 아니라 어떤 필연이고 선택이다. 역사는 매순간의 선택으로 구성된다. 결혼이나 취업에서부터 어물전 고등어 한 마리 고르는 것까지 선택이 작용한다. 선택의 기준은 다양하다. 대체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일인가, 할 수 있는 일인가이다. 반면 선택 조건은 간단하다. 바로 내 행복인 것이다. 하지만 기적이 되는 선택들은 타자의 문제, 행복이 모두와 함께 하는 것인가를 고뇌한다. 이는 결국 가치, 곧 철학의 인식으로 이어진다.

선택은 하나의 계단이어야 하지 않을까. 선과 악,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 좌우 등 양극단을 오가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오름이 되어야 한다. 몸과 영혼이 향상되는 자리 말이다. 그것은 이성이 간교해진 기계적인 세계가 아니라, 감성이 작동하는 가슴의 세계이다. 양극만 강조하는 선택의 오류는 우리를 얼마나 혼란하게 하는가. 위를 바라볼 때 우리는 뒤꿈치를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선택은 자기희생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내게 생기는 이익이 아니라, 모두에게 생기는 이익을 계산해야 하는 것이다. 이쯤서 우리는 진정한 대지적 모성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제 자식 배부른 것만 좋아하지 말고, 자식을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존재로 가르치는 힘 말이다. 자발적인 가난을 우리는 청빈 또는 겸허라고 부르지 않는가. 물질적인 가치가 모든 잣대가 된 사회는 미래가 없다. 공짜 치즈는 쥐덫에만 놓여있다는 러시아 속담이 문득 떠오른다.

선거가 코앞이다. 고등어나 푸성귀를 고르는 데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면 그만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절실한 건 타자의 삶, 그 소외와 절망에 어떻게 공감할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이다. 이야말로 진리를 향한 모험이기에. 맹자는 是非之心을 지혜의 단서로 이야기했다. 타자뿐 아니라 제 자신까지도 스스로 착취하면서도 자유라고 착각하는 이 소비사회에서 옳고 그름을 가릴 줄 아는 마음이란 무엇일까. 是非의 문제도 본래를 지키는 큰 마음 자체이며, 타자의 고통을 찾아가는 대인의 발걸음이 아닐까. 공존이라는 숙제 앞에서 꽃들이 화창하게 피어나는 중이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 새롭게 보는 눈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결국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건 나의 눈뿐인 것이다.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도 나의 선택뿐이다. 책 속에서가 아니라, 이 시대의 현실에서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기적을 기다린다. '우린 부산만 바라보고 있다'며 뜬금없이 충청도 한 시인이 전화를 해왔다. 괜한 조바심에 며칠 전 잃어버린 천리향이 간절하다. 어디서든 환한 향기를 발휘하고 있겠지. 천리 밖에서라도 그 향기를 보내오지 않을까. 쓸쓸해진 빈 화분에 지난 해 안동 친구집 앞마당에서 받아온 범부채 씨앗을 심어야겠다. 이 또한 제자리가 되기를 바라며, 이 또한 기적을 만드는 선택이고 인연이라 믿으며.

시인·백년어서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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