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아내가 연둣빛 새순 같은 웃음을 피워 물었다. 이 여편네의 가슴에도 봄바람이 살랑거리는 건가. 부러 나는 모르는 척했다. 그랬는데 밥숟갈 놓기 무섭게 은행에 송금할 일이 있다며 옆구리를 간질이고 나서는 게 아닌가. 그러면 그렇지. 이유 없이 '썩소를' 날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가시긴 했지만 그렇다고 살 맞대고 사는 사이에 그만한 일에 강짜 부릴 것도 없었다. 해서 이왕 출근기사 노릇하는 김에 조금 일찍 나서기로 작정하고 현관을 나섰다.
은행 앞에 아내를 내려주고 정차하고 있을 때였다. 지나가던 여고생이 까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얼른 시선을 돌렸다. 순간 칼 맞은 수박처럼 내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웬 사내가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마치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지 않으면 저승의 문지방을 넘어가버릴 것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냅다 차문을 열고 달려갔다. 한데, 이게 무슨 일이람. 사내의 바지가 무릎 아래까지 내려져 거웃이며 거시기까지 온통 드러나 있는 상태가 아닌가. 아니, 사람들 많이 오가는 길바닥에서 아랫도리까지 일광욕시키고 있다니. 이봐요, 여기서 왜 그러고 있어요? 괜찮아요? 사내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저 보내는 신호라고는 신음이 전부였다. 바짓단으로 손길을 뻗던 나는 그만 코를 싸쥐고 말았다. 사내의 몸에서 문뱃내가 물씬 풍겼던 것이다. 뿐인가. 바지에서 오줌 버캐냄새까지 피어났다. 순간 나는 잠시 우두망찰할 수밖에 없었다. 앉을 자리며 설 자리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취객 하나 때문에 아까운 시간 허비한다는 게 마뜩잖았던 것이다.
하지만 저 은밀한 우리들의 귀한 남성 생식기까지 세상에 공개한 상태로 돌아서기에는 좀 그랬다. 아저씨, 보아하니 제법 취하신 것 같은데 제가 도와드릴 테니 바지라도 우선 좀 올립시다. 다시 손을 갖다대는 찰나였다.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 손을 후려쳤다. 그러고는 눈을 부라리고 노려보는 게 아닌가. 꼴이 여차하면 벌떡 일어나 뺨이라도 칠 기세였다. 네가 뭐야? 네가 뭔데 간섭이야! 사내의 입에서 터진 그 다음 말은 더 가관이었다. 무슨 길바닥에 과일 씨가 있다고 '씨 봐'를 연거푸 읊어대는 건지. 어이가 없어 웃음만 터졌다. 그런 와중에서 사내의 목구멍에서는 아직 간밤의 소주병 뚜껑이라도 걸려있는 것인지 연신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기 바빴다.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은행의 볼일을 끝낸 아내가 다가오다가 소리쳤다. 사내는 언제 소리쳤느냐는 듯이 다시 조용히 몸을 떨고 있었다. 사내의 기특한 연기실력에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냥 가, 출근시각 늦었어! 아내의 채근에 그냥 돌아서려 했다. 한데 귀밑으로 흘러내리는 핏줄기가 보이는 게 아닌가. 그 바람에 주머니 속의 휴대전화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휴대전화가 울었다. 학장동파출소인데요, 출동해서 확인해도 부국할인마트 옆의 농협은 없는데, 혹시 위치를 다시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상터미널 근처로 가다가 농협을 발견하고 서서 신고를 한 거라고 자초지종을 다시 얘기하자 수화기 안에서 아, 하는 소리가 터졌다. 거기라면 학장동이 아니고 감전동이네요. 곧 조처하겠습니다. 휴대전화는 다시 고요함에 빠졌다. 휴대전화가 다시 울린 건 직장 가까이 왔을 때였다. 감전동파출소 박 순경입니다. 신고해주셔서 감사하고요, 현장에 출동해 모든 안전조치를 다 취했습니다. 그러면서 묻지도 않은 취객 이름이며 저간의 행적까지 언급하는 것이었다. 그 양반은 아내를 잃고 자식 하나 없이 혼자 사는 처지라고 했다. 어쩌면 그게 하루 일당을 술로 몽땅 바꿔먹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그를 더 철저히 고립시킨 건 누구였을까. 악수를 건네면서도 정작 손은 내밀지 않는 우리는 아니었을까.
전화를 끊은 후에도 취객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리고 박 순경의 혀 차는 소리까지도. 내가 나서도 될 일을 경찰서에 신고정신을 발휘한 게 '살짝' 미안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밀려오는 뿌듯함이 더 컸다. 신고전화를 제대로 처리해준 경찰에 대한 듬직함에다 생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저절로 휘파람이 터지고 어깨가 으쓱거렸다. 거리에 순찰차도 많아 보였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