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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간판과 사교 /강영조

업종·도시에 따라 개성 발휘 가능한 세련되고 함축 있는 간판 정비수법 필요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2-06-27 19:57:06
  •  |   본지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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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도시는 거대한 경작지다."

아시아의 도시를 둘러본 프랑스의 도시학자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국제주의 양식의 초현대식 건축과 그 나라 고유의 전통적인 건물이 공존하는 도시와 건물 전면에 원색의 크고 작은 간판을 빽빽하게 붙여 놓은 거리를 처음 걸어본 그의 뇌리에 여름 장마 때 잡초 무성한 경작지가 떠올랐던 것일까. 유럽의 도시는 각종 규제 등으로 도시 경관을 통제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도 1960년 대 앙드레 말로가 문화부 장관으로 있을 때 제정된 문화재 보호 정책과 도시 경관 계획을 따르고 있다. 스위스의 목가적인 경관 역시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무분별한 개발이 엄격하게 규제되고 있다. 그런 고전적인 도시에서 생활하던 그의 눈에는 개개인의 취향이 무질서하게 거리에 드러나 있는 아시아의 도시가 미숙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아시아 도시의 미숙성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것이 상점의 간판이다. 이쯤 되면 경관공학자들은 어떤 간판이 좋은 것인가 라는 물음을 던지고 그 해답을 찾기 시작한다. 오래 전이지만 상업 건물의 간판이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심리 실험을 한 적이 있다. 한국과 일본의 대학생들에게 도시의 풍경을 촬영한 사진에 다른 것은 그대로 두고 오직 간판의 글자만을 각각 한국어, 일본어, 영어, 아라비아어로 바꾼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어떤 풍경이 더 좋은가를 물었다. 한국인 학생들은 한국어가 아닌 다른 나라 언어로 쓰인 간판으로 바꾸어 놓은 거리를 이국적인 풍경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일본인 학생들은 한글 등 일본어가 아닌 간판이 빼곡히 서 있는 거리를 색다른 풍경으로 보고 있었다. 자국어 간판이 걸린 거리에 평가점이 낮게 매겼던 것은 물론이다. 간판의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거리 경관의 선호도가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는 실험이었다. 이 실험의 결과로 시민들은 상점의 간판에서 그 간판에 쓰인 언어의 의미를 읽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간판의 기능은 상점 주인이 고객에게 상행위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호명의 유래나 글씨 크기, 서체, 색 등에서 그 간판의 주인이 그들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정보의 의미를 해독한다. 그 전달의 방법이 장소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고 심지어는 무뢰하게 느껴진다면, 그런 간판이 내걸린 거리를 거니는 시민들은 불쾌한 심정이 되는 것이다. 간판으로 상점 주인과 그 상점을 이용하는 고객은 서로 사교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붉은색 배경의 노란색 글씨(그 반대도 있다), 형광색 도료를 사용하거나 점멸하는 글자를 건축물의 형태나 재료와는 무관하게 가급적 눈에 잘 뜨이도록 크게 내붙인 간판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왠지 그 가게의 주인들이 자기들 가게로 들어오라고 핏대를 세우고 고함을 지르는 듯한 착각이 든다. 거기에는 고객에 대한 겸손한 예의나 진중한 몸가짐은 어디에서도 엿볼 수 없고 천박한 상업성만 거리에 넘친다. 이런 거리를 사람이 사는 안식처라고 할 수는 없다.

결혼식과 장례식에서 우리 사회가 마련해 놓은 사교적 약속에 따라 각각 다른 복장과 표정을 짓듯이 간판은 상점의 업종이나 도시적 맥락에 따라 각각 그 개성이 발휘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들쭉날쭉하던 전통시장의 간판을 꼭 같은 크기와 글자체에다 심지어 번호를 매긴 통일된 모양으로 정비해 놓고 보니, 비슷비슷한 식자재를 파는 자잘한 가게가 연이어 있고, 제각각 솜씨를 뽐내던 가게 주인이 이 가게 저 가게의 식자재를 눈길로 품평하며 지나가는 손님을 향해 정겨운 목소리로 호객하던 활기찬 시장 풍경이 일순 착 가라앉고 가게 특유의 개성도 함께 사라진 느낌이 들지 않던가. 넓은 도로에 면해 있는 중심 상업지역의 상점과 좁은 길에 머리를 맞대고 올망졸망 자리 잡고 있는 전통시장 작은 가게의 간판 디자인은 다른 개념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간판은 접객의 사교술이기 때문이다.

우리 도시가 프랑스 도시학자가 말한 농촌의 경작지에서 성숙한 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사교에 바탕을 둔 세련되고 함축 있는 간판 정비 수법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동아대학교 조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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