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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흔쾌한 일상, 흔쾌한 진실 /김수우

함께 살기 위해서 기꺼이 불편 감수 이치가 몸에 밴 이웃과 만남은 행운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2-08-24 20:38:24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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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인데도 잡화점 안은 컴컴했다. 눈에 조금 익숙해지자 그야말로 오만 잡동사니가 빼곡이 쌓인 가겟방이다. 필요한 것을 찾으니 늙은 아낙은 잠시 뒤적거리더니 이내 챙겨준다. 이리 침침한데 왜 불을 안 켜고 있어요. 텔레비전에서 그라는데 나라에서 전기가 모자라다 안 하요. 우리가 애껴야지. 흔쾌한 일침. 전력 수급 위기 운운하던 팔월 초였다.

고춧가루 이천 원어치만 팔 수 있나요. 한 숟갈이면 되는데. 물어물어 찾아낸 길가 모서리에 작은 부식가게에서였다. 주인할매는 구석에서 유리단지를 꺼내오더니 비닐봉지에 쏟는다. 쬐금만, 쬐금만요. 농사지은 것이라 팔아본 적 없어. 이천 원어치가 얼맨지 몰라. 자꾸 붓는다. 비닐봉지가 볼록해졌다. 너무 많아요. 그냥 가져가. 구멍가게에서 얻은 또 하나의 일침이었다.

일상의 틈을 비집고 나선 짧은 여행길. 동해안 작은 어촌에서 마주친 두 개의 시간은 내게 큰 선물이 되었다.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가 선명하게 다가오는, 그야말로 흔쾌한 일침이었다. 거기엔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방식이 그대로 바람처럼 햇빛처럼 머물고 있었다. 평상으로 거지를 불러앉혀 밥 한 그릇 퍼주는 일이 당연하던 생명의 전통 말이다. '나' 중심이 아니라 '함께'가 중심이던 공감을 제대로 배운 셈이다.

그들이 인문학을 어떻게 공부를 했겠는가. 단테의 신곡을 배웠는가. 아도르노의 미학을 읽었는가. 공존을 주제로 토론을 했겠는가. 하지만 인간의 구원이 무엇인지,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그들은 정확하게 아는 게 아닐까. 삶의 이치란 몸에 먼저 배는 법이다. 우리가 이 지상에 태어난 건 함께 살기 위해서다. 이 진실을 온몸의 노동으로, 온몸의 시간으로 익힌 사람들, 몸뚱이는 남루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유리알처럼 투명하다.

그들은 진리를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실천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그냥 산다. 부지런하고 알뜰하게. 그러면서 손해도 보고 이익도 본다. 삶이란 게 그런 건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이다. 애써 궁리하지 않는 삶이다. '흔쾌'란 잘 궁리해서 만드는 행위가 아니다. 흔쾌하다는 것은 너그러움과 순수함과 유쾌함이 보태진 말이다. 자유와 자연이 덧셈되어 나오는 행동이다. 이는 순간적인 별똥별의 기도와 닮았다. 일상 속에서 오래 닦여져 어느 상황에서나 즉시, 저절로 발현되는 진실 같은 것이리라.

그 자유는 홀로 누리는 진실이 아니라, 남을 배려하는 진실이다. 그 자유는 흔쾌하다. 그야말로 종심(從心)의 세계인 것이다. 육십 년을 건너온 늙은 아낙들이 마치 다섯 살 계집애들의 소꿉살이처럼 단순하고 명쾌하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용서하는 일도, 물건을 사는 일도 파는 일도 그렇게 흔쾌하고 투명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이 하고자하는 대로 해도 도에 어그러지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순수한 경지인가.

'함께'라면 어떤 불편도 즐겁게 해낼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주변에 넘쳐나는 정보들이 바로 그런 사랑에 닿는 여울이면 좋겠다. 이익사회에서 불편을 넉넉히 감수하고 있는 이웃을 본다는 것도 행운이다. 히말라야 장대한 산맥을 바라보거나 파미르의 거대한 고원을 달리는 느낌과도 같다. 손해와 이익을 따지는 사람, 편리와 불편을 따지는 사람, 끊임없이 따지다보니 법규만 자꾸 많아진다. 우리가 갇힌 무수한 경계들이 서로 아프다. 경계만 늘어나다보니 조화를 이루어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다.

여행이란 일상을 벗어나 일탈을 통해 자기를 환기하는 과정이다. 결국 우리는 마음을 여행하는 것. 사람이 곧 숲이고 자연이고 일탈이고 일상이다. 사람이 곧 화엄인 것이다. 나도 그렇게 늙을 수 있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전기걱정하면서 스위치도 내려놓고, 농사지은 것을 푹푹 덜어주는, 순진하고 고지식한 여행자이고 싶다. 함께 살기 위해서라며 기꺼이 손해를 볼 줄 아는, 이치가 몸에 밴 늙은이로 늙어가고 싶다. 그래서 일상이 특별한 선물이 될 수 있다면 모두 행복해지지 않을까.

휴가철은 끝났다. 그러나 우리의 여행은 계속된다. 바로 사람을 만나는 여행인 것이다. 화엄을 향하여 말이다.

시인·백년어서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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