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를 둔 엄마의 입장에서 공포를 느끼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강력 사건들이 연일 신문지상에 오르내린다. 집에서 잠자던 일곱 살짜리 딸이 납치된 후 성폭행을 당하고, 아르바이트하러 간 딸이 성폭행을 당하고 자살하거나 의문사한다. 어린 아들이 잠든 옆에서 임산부가 성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자신이 혹은 자신의 딸이 기막힌 피해자가 된 그 엄마의 심정이 어떨까?'에 감정이입하다가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그 가해자들의 엄마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심정일까?'. 바로 '케빈에 대하여'(린 램지·2011)와 '마더'(봉준호·2009)에 그에 대한 부분적 대답이 들어 있다.
16세의 케빈은 생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대낮에 아버지와 여동생을 살해하고 저녁에는 자기가 다니는 학교의 친구들을 무차별 학살한다. '케빈에 대하여'는 이 사건을 통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엄마 에바의 과거와 현재를 따라가며, '괴물'을 낳고 길러낸 관계와 환경을 묘사한다.
모자란 아들 도준을 홀로 기르던 혜자는 도준이 살인범으로 체포되자 아들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범인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마더'는 도준이 실제 살인범이고 이를 알게 된 혜자가 결정적인 목격자를 살해하는 또 다른 살인자가 되고 마는 충격적인 결말로 치닫는다.
이들 영화에서 두 엄마가 살인범 아들을 갖게 된 직간접적인 원인이 하나는 조금은 모자란 모성애로, 다른 하나는 조금은 과도한 모성애로 제시된다는 사실은, 이 시대에 모성이라는 것이 어떻게 구성되고 제도화되며 또 재현되는가라는 질문에 대면하게 한다.
앤 오클리는 '모성애는 모든 여성은 어머니가 될 필요가 있고, 모든 어머니는 자식이 필요하며, 모든 자식은 어머니가 필요하다는 신념에 근거한 신화'라고 말한다. 아드리엔느 리치는 모성의 경험과 제도적 모성을 구분하면서, 전자가 여성에게 기쁨과 힘을 부여하는 것인 반면 후자는 여성에 대한 통제와 억압의 원천이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은 모성에 담긴 사랑과 보살핌의 윤리는 긍정하되, 여성을 생물학적 재생산과 어머니 역할에만 가두는 모성 신화와 제도적 모성에 대해 싸워왔다.
그런데 이외에도 가부장제적 사회는 모성을 둘러싼 기이한 재현을 멈추지 않아왔다. 우선 생리 임신 출산과 같은 여성의 재생산적 기능은 전통적으로 여성을 문명과는 대립되는 '자연'으로, 가부장제의 '타자'로 위치지우면서 위협적이거나 부정적인 것으로 표상한다. 또한 몇몇 공포영화들이 보여주듯이, 자식을 성공적으로 사회에 진입시켜야 한다는 모성의 역할을 거부하는 어머니들은 가장 추하면서도 사악한 괴물로 형상화되는데, 이는 모성이 지니는 재생산적 기능에 대한 남성들의 질시와 두려움이 악몽적으로 표현된 것으로서 해석된다.
'케빈에 대하여'는 자유분방하고 야심 넘치는 여행가 에바가 애초부터 임신을 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이와의 진정한 소통에 끊임없이 실패했다는 점에서 케빈의 학살이 16년 동안 응답받지 못한 엄마의 사랑과 인정에 대한 복수임을 암시한다. '마더'의 혜자는 오래 전 어린 아들과의 동반 자살을 시도했다는 원죄의식과 근친상간에 가까운 아들과의 심리적 결착으로 인해 아들도, 자신도 모두 괴물이 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런 점에서 두 영화는 모두 자식을 정상적으로 사랑하고, 자식과 함께 성숙해지지 못한 엄마들의 극단적인 비극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든 여성들에게 모성의 경험이 그저 충만하고 희열에 찬 경험만이 되기는 어렵다. 그리고 '부모되기'가 철저히 준비된 채로 자신의 아이를 맞게 되는 경우도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면 자식과의 관계 맺기에, 자식의 욕망 읽어내기에 부분적으로 실패한다고 해서 '좋은 엄마'가 아닌 것은 아니며, '좋은 엄마'가 아니라고 해서 '나쁜 여자'인 것은 아니다. 더구나 모순 투성이 교육 시스템 속에서 그저 자기 아이의 출세와 성공을 위한 무자비한 경쟁에 내몰려야 하는 이 땅의 엄마들에게 개인적 책임과 비난을 돌릴 수만도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들의 모성 재현이 조금은 불편하고 꺼림칙한 것이 지나친 피해의식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영산대 영화영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