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문학작품의 읽기와 이론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랑시에르에게 미학이라는 것은 "예술을 인식하고 그것을 반영하는 구체적인 체제"이다. 그렇게 낯설지 않은 정의이다. 랑시에르는 미학과 예술을 분리하는 '반미학'을 무의미한 것이라고 파악한다. 미학 없는 예술은 성립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미학이라는 감각의 체계가 없다면 예술은 식별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예술이라는 것이 앎의 문제, 그것도 자기-앎의 문제라면, 미학은 더욱 예술 또는 문학과 분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미학은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생성하는 전제조건이다. 랑시에르가 감각적인 것을 가시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감각적인 것은 어떤 이미지이다. 인식을 지배하는 이미지라는 개념은 실제로 '본다'는 것을 앎과 동일시했던 고대적 사유체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항상 말할 수 있는 것을 규정하고 있는 글을 '평등의 언어'라고 말한다. 물론 그에게 평등의 언어라는 것은 침묵의 언어이기도 하다. 글을 통해 사람들은 소통하고 공통성을 구축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랑시에르는 글을 감각적인 것을 나누는 '적절성의 논리'로 파악한다. 이 적절성의 논리야말로 랑시에르가 말하는 미학이며, 이런 맥락에서 미학은 결코 정서적인 것이 아니라 인식적인 것이다. 이 인식은 기본적으로 체제적인 것이고, '보편적'이다.
랑시에르의 주장처럼, 미학이 인식적인 것이라면 궁극적으로 이론 없는 예술은 불가능하다. 미학은 예술을 억압한다. 새로운 예술은 이런 미학의 억압을 뚫고 태어나는 '정치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예술은 철학적이라기보다 이론적인 측면을 갖는다. 미학이 언어의 공통성 위에서 구축할 수 있는 '평등'의 문제라고 한다면, 이 평등에 의문을 제기하고 소음을 만들어내는 문학은 하나의 체제로서 훨씬 적극적으로 이론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에게 미학은 정치적인 것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다. 감각적인 것의 나눔을 결정하는 미학은 공동체의 규율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공동체를 구성하는 '인민'은 미학을 통해 인식의 적절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문학작품이 출현하는 것은 이런 적절성을 판단하는 기준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 변화는 기존의 지식체계에 균열을 초래한다는 측면에서 언제나 정치적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리얼리즘은 세계를 민주주의적으로 인식하는 관점의 출현을 의미했다. 플로베르의 문학이 공공연하게 정치성을 표방했기 때문에 민주주의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플로베르가 추구한 중성적 스타일의 출현에서 위계적 습속의 체계를 탈가치화하는 정치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플로베르의 사례에 해당할 만한 것이 바로 백낙청이 제기한 민족문학론이다.
대체로 민족문학론은 '민족'이라는 이념적 스펙트럼에 준거해서 평가받아 왔지만, 내가 보기에 중요한 지점은 민족문학론을 지탱하는 '리얼리즘'이라는 평등의 미학이다. 민족문학의 리얼리즘은 단순하게 정치적 이념이나 방법론이라고 보기 어렵다. 민족문학과 리얼리즘의 관계 자체가 보여주는 것이 이론과 분리할 수 없는 문학의 운명을 보여준다. 민족문학은 미학적 범주의 발명을 통해 현실세계를 전도해서 '내면'을 탄생시킨 순수문학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었다. 이를 위해 민족문학은 먼저 순수문학론을 비판할 '이론'을 구축해야 했다.
얼마 전 기대했던 노벨 문학상이 중국작가 모옌에게 수여된 뒤에 한국 문학계는 술렁거렸다. 노벨 문학상을 받기 위해 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과연 노벨 문학상을 문학의 목적으로 삼는 것이 타당한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 오히려 과거 민족문학론 같은 '이론'이 보여줬던 패기가 실종되어 버린 채 출판자본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는 현재의 문학현실을 반성해야하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할 것이다. 랑시에르의 말처럼 문학이 특정한 미학체제의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
경희대 영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