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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신명의 마당 /이성희

우울·피로한 사회, 남과 신명 나누는 마당 잃어버린 탓…자기착취 벗어나야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3-04-24 20:18:52
  •  |   본지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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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는 허물없이 드나드는 이웃 사람들과 장독대, 그 곁의 풀꽃들, 풀을 흔드는 바람, 온갖 벌레들로 늘 가득하였다. 평상에 누워 어머니를 기다리는 한여름 밤에는 별들이 소복이 거기에 내려앉기도 하였다. 예전 우리들의 마당은 그러했다. 온갖 살아 있는 것들의 놀이터였으며, 때로는 흥청거리는 잔치판이 벌어지는 현장이기도 하였다. 우리 옛 놀이판 역시 거의가 원형의 마당에서 행해졌다. 마당은 흥이고 신명이다. 한자 '興(흥)' 자의 갑골문을 보면 여러 손들이 모여 무엇인가를 함께 들고 있는 모양이다. 일본 학자 시라카와는 이것을 여러 사람이 모여서 지신(地神)을 불러내는 모습이라고 보았다. 이 지신을 불러내는 고대의 현장이 어쩌면 최초의 마당놀이였을지도 모른다.

요즘 우리 사회를 '피로사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계화된 속도와 경쟁은 이제 내면화되어 무한히 자기 자신을 착취하여 스스로를 탕진해버리는 소진증후군, 그런 소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끼는 데서 오는 우울증의 사회이다. 얼마 전 자살한 전교1등 고등학생이 남긴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어요"라는 문자는 심각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하다. 따져보면 그럴싸한 많은 원인들이야 많겠지만, 우리의 삶이 우울하고 피로한 이유 중의 하나는 무엇보다 우리가 손과 손을 함께 하는 흥과 신명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우리 전통의 마당과는 달리 근대 서양의 연희 무대는 무대와 객석이 완전히 분리된 프로시니엄(액자) 무대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고대 그리스의 극장은 기이하게도 반원형이다. 젊은 날의 지적 열정으로 가득한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그리스의 정신이 구현된 비극이 어떻게 탄생하였는지를 규명하고 있다. 비극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두 신의 만남에 의해 탄생한다. 아폴론이 빛과 질서의 머리라면, 디오니소스는 어둠과 혼돈의 심장이다.

디오니소스가 죽어서 다시 소생하며 초목과 과실의 신이란 점은 그의 원래 정체가 지신 계열임을 짐작하게 한다. 비극은 디오니소스 신도들이 벌였던 난장의 디오니소스제전에서 출현하였다. 지신을 불러내는 흥, 집단 신명을 구현하고 있는 것은 비극에서 코러스(합창단)이다. 처음 비극은 코러스만으로 이루어졌다가 점차 배우들의 연기가 덧붙여졌다. 무대의 돌출된 반원은 지신을 불러내는 코러스의 장소, 디오니소스의 자리이다. 아마 최초 코러스의 무대는 아예 원형의 마당이었을 것이다. 반면 이후 점차 덧붙여지게 된 배우들은 벽 쪽에 있는 액자 무대에서 연기를 했다. 그곳은 빛과 질서의 자리, 아폴론의 자리다. 비극의 반원형 무대는 디오니소스와 아폴론 사이 타협의 산물이다. 그러나 서양의 연극사는 코러스 마당의 점차적 소멸과 액자 무대의 완성 과정이다.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 과정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 근대 문명사 전체에도 해당된다.

집단 신명을 일으키는 마당놀이의 가장 큰 특징은 무대와 객석이 엄밀하게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연희자가 쉴 새 없이 객석을 드나들며 관객들과 걸쭉한 입담을 나누고, 관객들은 끊임없이 추임새를 넣는다. 이러한 되먹임 속에서 흥이 증폭된다. 그리하여 막판에는 기어코 모두가 한데 어우러지는 대동 놀이판이 열린다. 그것은 모든 맺힌 것을 푸는 일종의 집단 치유이기도 하였다. 이제 우리는 정치에서도 생활에서도 놀이에서도 그런 마당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흥과 신명의 에너지는 억압되지만 아주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호시탐탐 그 분출의 기회를 노린다. 2002월드컵에서의 거리 응원이 그것이며, 아무런 배후 조직도 없이 자발적인 저항의 축제를 이루었던 촛불집회는 그 생생한 증언이다.

남과의 경쟁적 비교와 자기착취에서 벗어나 타자와의 신명나는 감응의 마당에서 우리 시대의 이 지독한 피로와 우울증은 혹시 치유될 수 있지 않을까. 흥이 없는 세상은 피로하다. 저들만의 액자 무대에 갇힌 정치를, 교육을, 경쟁과 성과의 프레임을 걷어치우고 지신을 다시 한 번 불러내어 신명의 치유 마당을 열 수는 없는 것일까? 생명의 심장을 다시 힘차게 뛰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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