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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가을은 오는 것일까 /이성희

혹서·혹한 반복되는 지구 병리현상이 우리 사회 뒤덮어도 치유의지 볼 수 없어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3-08-28 19:57:09
  •  |   본지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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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여름의 점령군들이 온 도시를 장악하고 있던 그 긴 폭염의 숨 막히는 기간, 모든 곳이 사막이었다. 온통 땅을 뒤집는 공사로 뿌리들이 거의 잘려나가던 때도 꿋꿋하게 살아서 학교 담장 축대에 기어코 푸른 세상의 지도를 그리던 담쟁이넝쿨들이 대부분 누렇게 시들어버렸다. 담쟁이 잎새에 가을의 단풍물이 조금씩 들어가면서 그려지던 자연의 벽화를 올가을엔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지독한 여름의 기세도 한풀 꺾였다. 처서 지나면서 내린 비에 오만한 점령군들은 어느덧 사나운 깃발을 거두고 서서히 물러날 채비를 하는 듯하다. 불볕의 햇살이 닿는 곳마다 펼쳐지던, 그 끝없을 것만 같았던 사막도 이제 그 끝자리에 이른 것일까? 그리하여 가을은 과연 저만치서 오고 있는 것일까? 문득 이런 새삼스러운 의문이 생기는 데는 약간의 이유가 있다.

한자의 원형인 상나라 갑골문에는 '봄 춘(春)' 자와 '가을 추(秋)' 자는 있는데 '여름 하(夏)' 자가 없다. '하' 자는 주나라 청동기에 새겨진 금문(金文)에 비로소 등장하는데 그 형상도 비를 기원하며 무당이 춤을 추는 모습이다. 그때 여름의 의미는 더위보다는 가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하다. '겨울 동(冬)' 자는 갑골문에 있을까? 있긴 있다. 그런데 그 형상을 보면 두 가닥 가지에 시든 잎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눈과 얼음의 계절이 아니라 차라리 처연한 가을 풍경에 가깝다.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추측이 가능하리라. 우선 주나라 이전에는 사람들이 계절을 봄과 가을로만 분별하여 인식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실제로 그때는 혹한(겨울)과 혹서(여름)가 없는 기후였을 가능성도 있다. 지구의 기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바뀌었다. 고대사에 빈번하게 일어났던 민족 대이동은 대부분 기후 변동 때문이었다. 유교의 경전인 오경(五經) 가운데에는 노나라의 역사서인 '춘추(春秋)'가 있다. 이 책명은 1년 춘하추동의 줄임말이 아니라 고대인들의 실제 계절 인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19세기 구한말, 극한의 고통을 겪고 있던 민중의 수난사 속에서 솟아난 놀라운 예지의 소식이 있다. 그 하나는 경주 사람 최제우의 동학이요, 다른 하나는 논산 사람 김일부의 '정역(正易)'이다. 김일부는 '정역'을 통해, 수천 년 동안 감히 아무도 손댈 수 없었던 역(易)의 기본 틀을 바꾸고자 했으니 참으로 대담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정역'에서 고통의 선천시대가 끝나고 새로 열리는 후천의 행복한 세계를 '유리(琉璃)세계'라고 작명하였다. 유리! 그 빛나는 세계는 이제까지의 동지(冬至)나 하지(夏至) 같은 혹한과 혹서가 축을 이룬 그런 기후가 아니라 춘분(春分)과 추분(秋分) 중심의 서늘하면서도 온화한 세상이라고 한다. 다시 '춘추'의 세상인 셈이다.

그런데 그 양반 아무래도 헛다리를 짚어도 한참을 잘못 짚은 것만 같다. 기후변화로 나타난 작금의 모습은 오히려 봄과 가을이 점차 줄어들고 극도로 더운 여름과 극도로 추운 겨울이 반복되고 있다. 벌써 올겨울도 몹시 추울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지구(가이아)가 신진대사와 자기조절을 하는 모종의 생명 유기체라고 한다면 혹서와 혹한의 반복이란 발열과 오한이 반복되는 심각한 병리현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혹서와 혹한의 주기적 교체는 우리의 생리와 심리에도 극단적인 조울증의 리듬을 만들어 낼 지도 모른다. 과도한 열광과 극도의 우울이 벌써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지 않은가.

이런 위기에서도 지구적인 차원의 병리 현상을 극복해낼 이념도, 의지도 별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난개발된 강들은 녹조라떼로 뒤덮이고, 후쿠시마에서는 끔찍한 방사능 오염수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숲은 오늘도 어김없이 잘려져 나가고, 도처에 괴질들이 발생하고, 칼 폴라니가 '악마의 맷돌'이라고 부른 시장은 여전히 생명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맹목적인 성장 경쟁 중이다. 지구는 지금 기후 일향 만강하옵신가? 그래도 담쟁이넝쿨에 단풍물이 곱게 드는 가을은 올 것인가? 후천의 눈부신 유리세계는 올 것인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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