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이 아닌 정보가 인간의 미래를 바꾼다'. 1980년대 후반 갓 대학에 입학했던 필자의 관심을 끌었던 책 서문에 적힌 문구였다. 바로 앨빈 토플러 '제3의 물결'의 한 문장이다. 지난 세기말 '미래쇼크', '권력의 이동'과 함께 대표적 미래학 베스트셀러이다. 당시에는 물질문명이라 불리는 후기자본주의 시기를 살다보니 손에 쥐어지는 물질이 아닌, 가치 매기기도 애매한 정보가 미래를 바꾼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었다. 고도의 과학기술과 반산업주의 특징을 지닌 다음 시기, 정보가 핵심적 역할을 하여 기존 산업사회와는 다른 직업의 형태를 양산하며, 최첨단 산업을 견인하고, 민주주의를 효과적으로 실현해 낼 것이라는 미래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정보가 중요하다면, 비밀스럽고 은밀하게 정보를 수집하여 가치로 재생산하는 것이리라 당시에는 짐작했다. 인터넷 보편화 이전이다 보니, 지금과 같은 대규모 정보의 유통이 이루어지는 세상으로 권력이 이동하는 순간을 목도하기까지 세 권의 책은 미래학 서적으로, 예언서로, 또 이제는 역사서로 다가온다. 국가, 정보 그리고 민주주의 이들의 관계는 세계의 정치경제 환경 변화와 함께 스스로 급변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 한 세기의 변화를 필자는 영국에서 맞이하였다. 한때 세계 패권국에서 이제는 한편으로 물러난 영국의 흥망성쇠와 당시 유럽연합(EU)의 진화를 현지에서 생생하게 지켜봤다. 유학 시절 템즈강변을 지날 때면 레고를 쌓아올린 것 같은 모습의 거대한 해외정보국 MI6 건물과 맞은 편 템즈하우스라 불리는 국내정보국 MI5 건물을 볼 수 있었다.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는 것이 정보기관의 특징으로 알고 있던 터라 처음 이 건물들을 만났을 때는 다소 놀라웠다. 하긴 007 영화에서 국장 M이 제임스 본드에게 지령을 전달하는 장소로서 유명하니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을 것이라 여겼으나, 이 또한 되짚어 볼 만한 부분이 있다.
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 창설된 비밀첩보국(SIS)이 국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은 것은 1994년이다. 영국 정부는 냉전 시기 여러 차례 첩보 활동이 발각되고, 영화나 소설에서 그 존재가 제기되어 왔으나 여전히 비밀기관의 존재를 부인했다. 그러나 1993년 유럽공동체가 유럽연합으로 지역통합을 진전시키며 다각적 측면에서 국가주권에 개입하게 되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유럽인권위원회가 회원국 정보기관의 법제화를 권고함에 따라 영국도 이듬해 이에 응했다. 회원국 간 첩보 활동이 충돌의 빌미가 될 수도 있음을 역내국들이 고민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후 MI5와 MI6은 주된 업무 영역의 투명화 및 열린 형태의 정보기관으로 변화하려 노력해 왔다.
'비밀기관은 그 국가의 심층적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 준다'. 영국의 저명한 첩보물 소설가 존 르카레가 MI5, MI6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실제 존 르카레는 두 기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다. 1, 2차 세계대전 전후와 냉전 시기에 영국 정보기관은 독일과 구 소련 그리고 북아일랜드에 이르기까지 교묘한 방법으로 상대의 정보를 취득하고, 탐색하며 교란시켜 왔다. 하지만 탈냉전과 특히 유럽 지역협력의 심화는 더는 이들 국가의 비밀기관이 은밀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전 시기, 정보는 국가에 의해 통제되고, 수십 년의 비밀보장 잠금쇠가 채워질 수 있었으나, 대량 정보의 광속 유통 시대는 국가와 개인 그리고 정보의 본질을 변화시킨 것이다. 이제 이들 기관은 폭증하는 정보를 관리하여 개량하고,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며, 타 기관 심지어 타 국가 정보기관과의 협력을 통해 긍정적 변화를 시도하게 되었다. 비밀이 아닌 비밀첩보국의 국장은 조직에 대한 자긍심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일국의 정보기관은 국가정체성과 주권에 대한 최후 표현이다'. 25편의 시리즈물 007에서 지령을 전달받는 장소로 익숙한 MI6. 비록 2012년 개봉된 007 스카이폴 편에서 MI6 건물이 폭발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실제로는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해 사회에 응답하며 건재한 모습으로 영국 국민과 공존하고 있다.
동아대 국제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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