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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꽃물이 들다 /이성희

꽃이 사람을 움직여 '듀센미소' 짓게 해

서로가 서로에게 꽃이 되면 세상은 아름다워라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4-04-09 20:14:11
  •  |   본지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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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벌써부터 성화다. 퇴근한 남편은 피곤을 호소하는 불쌍한 표정으로 한껏 버텨보지만 결국 백기를 들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부부는 저녁 산책을 나선다. 건강을 위해 매일 저녁 한 시간쯤 걷자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꽃구경이 주된 코스가 될 터이다. 화창한 봄밤, 흐드러지게 만개한 벚꽃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처럼 눈부시다. 밤하늘을 수놓은 환상적이고 황홀한 아름다움 속을 걷는다.

1300여 년 전 어느 봄밤, 시선(詩仙) 이백은 복사꽃과 배꽃이 만발한 정원에서 춘흥을 이기지 못해 촛불을 켜고서 밤새도록 노닐었다. 그날 밤의 흥취를 서술한 '춘야연도리원서'의 첫대목은 이렇다. '무릇 천지는 만물이 쉬어가는 여관이요/시간은 긴 세월을 지나가는 나그네라/부평초 같은 인생 꿈같은데 즐긴다 한들 얼마나 되리/옛사람이 촛불 켜고 밤에 노닌 것은 다 까닭이 있음이라'. 화려한 봄밤의 축제 속에 오히려 비애의 정감이 물안개처럼 스멀거리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난을 피해 방랑하던 두보가 59세에 지은 시 '강남에서 이구년을 만나다', 그 시의 '꽃 지는 시절에 또 그대를 만나 보는구나'라는 평범한 구절이 새삼스레 가슴에 아련하게 환기되는 것은 꽃의 그늘에 일렁이는 무상감 때문인가.

꽃을 그린 정물화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시작된다. 네덜란드의 정물화들은 화면을 온통 화려한 꽃들로 채우고 있는데, 미술사가들은 그 도상적 의미를 '덧없음'이라 한다. 화려하지만 쉬 시들고 마는 꽃의 덧없음. 과연 그렇기만 할까? 결코 싼값이 아니었던 꽃그림을 구입해 놓고 바라보면서, 네덜란드인들은 인생의 허무만을 싸늘한 가슴으로 되씹고 있었을까? 별로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는 꽃이 상품화되기 시작했고, 특히 튤립열풍이 거세게 불었다. 줄무늬 튤립인 '셈퍼 아우구스투스' 알뿌리 하나가 1만 길더에 팔렸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큰 저택 한 채 값에 해당한다고 하니 꽃이 일종의 투기나 벤처사업인 셈이었다. 이런 꽃 열풍 속에서 그들은 아마 꽃의 형상과 빛깔을 그림으로라도 향유하고자 하지 않았을까. 덧없기 때문에 더욱 절실한 아름다움을 말이다.

그 정감이 아름다움이든 덧없음이든 간에, 꽃의 저 실로 다양한 자태와 눈부신 빛깔과 향기에는 생명 진화의 놀라운 비밀이 담겨 있다. 백악기에 지구에 새롭게 등장한 속씨식물은 생존의 전략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대지에 피어나기 시작한 꽃은 진화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다. 속씨식물은 화려한 꽃을 피움으로써 다른 종(동물)을 유혹하고 그들을 통해서 자신의 씨앗을 널리 퍼뜨렸다. 이것이 결과적으로 획기적인 공진화를 일으킨 것이다. 식물은 유전자를 날라주는 대가로 동물에게 영양분을 공급해 주었고, 속씨식물의 영양분에 의해 온혈동물인 포유류가 등장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생명의 진화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서게 된다.

속씨식물은 또한 변화하는 환경과 동물들의 취향에 맞추어 꽃을 새롭게 개량하고 개발하면서 지구를 다채로운 빛깔과 향기로 뒤덮었다. '욕망의 식물학'의 저자 마이클 폴란에 따르면, 속씨식물의 비상한 전략은 곤충과 동물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을 꽃으로 유혹하여 식물 자신을 위해 움직이고 생각하도록 만든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꽃을 욕망하게 하고 공원에, 도로가에, 정원에, 창가의 화분에 끊임없이 자신의 종자를 퍼뜨리도록 만든 것이다. 인간이 꽃을 관리하고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꽃이 인간을 이용하고 조종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식물의 전략이면 또 어떠랴. 한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은 다른 어떤 선물보다 꽃을 선물로 받았을 때 자기도 모르게 100% 듀센 미소를 짓는다고 한다. 듀센 미소는 프랑스 심리학자 듀센이 관찰한 것으로 입술 근육과 눈가의 근육이 함께 움직이며 미소 짓는 것으로 마음으로 우러난 진정한 기쁨의 미소를 뜻한다. 꽃의 기쁨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는 마음은 어딘가 병든 것일지도 모른다. 조선의 문호 연암 박지원은 꽃술이나 곤충의 더듬이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문심(文心)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 문심이 꼭 문인의 마음이기만 하랴.

인간은 오래 전부터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에도 이 꽃의 기쁨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네안데르탈인들은 죽은 자 옆에 꽃을 뿌렸고,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도 종종 놀랄 정도로 잘 보존된 꽃이 발견되곤 한다. 인간이 치른 최초의 종교 의식을 가능하게 한 것이 또한 꽃인 모양이다. '화엄경'은 온 우주가 장엄한 꽃임을 말하고 있다. 꽃을 향유하고, 꽃을 나누고,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꽃으로 피는 세계가 장엄한 화엄세계가 아니겠는가.

산책에서 돌아온 아내가 거울을 보면서 "화사해졌네" 한다. 남편 왈, "당신, 꽃물이 들었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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