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한가위를 맞은 가정은 여러 가지 상(床)을 펼쳐왔다. 왕방울만 한 탐스러운 달님이 돋보였던 올 한가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당연히, 전국에서 모여든 일가식솔이 첫 번째로 대하는 상은 조상께 올리는 차례상이다. 제주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정성이 여전하다면 차례상 가짓수와 종류는 지난해보다 더 풍성해지기 마련이다. 반대일 수도 있다. 요즘처럼 불경기가 이어진 때라면 더구나 그렇다. 해서, 이 차례상 차림새는 위정자들이 받아든 올1~3분기 성적표이기도 하다. 팍팍한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부문이 절망스러운 올해, 그 성적표는 보나 마나가 아니겠는가.
차례상을 무른 다음에는 두 번째 상이 등장한다. 차례상과 달리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위정자에게 따끔한 상이다. '민심 밥상'이기 때문이다. 피붙이끼리, 오랜만에 만난 벗들이나 지인끼리 대화를 나누다 보면 이 상에 다양한 '메뉴'가 오른다.
팔도에서 활동해온 각계각층 남녀노소가 쏟아낸 이것을 정리해 놓고 보니 '2014년 판 민심 백서'가 따로 없었다. 그 백서 첫머리에는 '대책 없는 불안전 사회'라는 소주제가 올랐다.
부산으로 말하자면, 머리에는 핵을 이고 발아래는 물 폭탄이 깔린 상황이라고 이구동성으로 혀를 찼다. 한 귀성객은 기습 폭우가 몰아쳤던 지난달 25일 부산 비상 상황을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보곤 도시가 아예 결딴나는 줄 알았다고 했다. 도로 아래 좁은 배수로에 한꺼번에 들이닥친 빗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아스팔트를 뚫고 위로 분수처럼 치솟는 기이한 장면이 전국에 생중계됐었다. 만유인력 법칙을 거스른 이 물 흐름은 보기에 섬뜩했다. 기자 역시 그날 오후 1~5시 동래구 수안시장 앞 도로를 비롯해 도시철도 교대역 일대가 황토물로 덮였다가 빠져나가는 초유 광경을 초조하게 지켜봤다. 빗물이 도로를 메워 앞을 가로막으니 시내버스가 갈 수가 없어 정기노선 중도에서 돌아나갔다. 하굣길 학생들은 종아리까지 차올라온 횡단보도 위 황토물을 헤쳐나가느라 우산을 시각장애인 지팡이처럼 사용해 도로 바닥 장애물을 좌우로 탐지하면서 건너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 피해 정도는 약과였다. 보도된 대로, 이번 기습 폭우로 부산에서만 5명이 도심 물 난리로 생명을 내놓아야 했다.
서병수 부산시장은 이런 결과를 두고 관계 공무원들을 되우 질책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들에게 직접 책임이 있는 건 아니다. 부산이 아열대 기후 도래에 대비해 도시 설계를 장기 안목에서 해 오지 못한 게 근본 원인이기 때문이다. 이는 앞으로 해안 비탈 도시인 부산이 핵누출 폭우 폭설 폭풍 같은 인공·자연재해에 강하도록 도시설계를 재조정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아울러 재난 예측·예보 체계가 하루빨리 구축되지 않는다면 당장 올겨울에도 유사한 사태가 재발할 우려가 크다는 경보이기도 하다.
민심 밥상에 올랐던 또 다른 소주제는 '중증 단절 사회'였다. 정치인과 국민 간, 군부대 지휘자와 사병 간, 교육 입안자와 일선 학교 간을 포함해 헤아릴 수 없는 부문에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푸념을 들을 수 있었다. 기자가 잘 아는 50대 초반 여성은 "우리 사회가 '경단녀' 대책 운운하지만 현실에서는 재기할 기회를 주는 데 아주 인색하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가까이서 지켜봐온 바, 그는 성실하며 늦은 나이에 석사학위를 따고 국가고시자격증까지 취득할 정도로 자기 계발에 열성을 가진 전 직장인이다. 그는 그동안 여러 차례 취업 문을 두드렸지만 그쪽에서 나이가 많다고 암시하며 채용하지 않아 상심이 크다고 전했다. 젊은이 취업도 쉽지 않은 불황기임을 감안하더라도 노령 인구 경제 활동 확대가 불가피해진 현실을 비춰 보면 이건 너무 심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올라갈 사다리가 끊긴 것 같아 우울하기는 하지만 세월호 유족처럼 이 사회에는 한가위에 차례도 제대로 지내지 못하거나, 입시생 취업준비생 같이 아예 명절과 단절된 많은 이들을 떠올리며 스스로 버틸 힘을 끌어올린다고 말했다.
그가 민심 밥상에 올린 건 '희망'이었다. 판도라 상자에서 온갖 재앙이 세상으로 다 빠져나간 뒤 희망만 남았듯이 힘없고 헐벗은 이들이 유일하게 간직한 게 역시 희망이다. 이 희망이 투실투실하게 살집이 붙어서 집마다 내년 한가위 민심 밥상엔 흥겨운 웃음소리가 새 메뉴로 풍성하게 올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