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계절이 시작된 모양이다. 개헌론이 횡행하고 있으니. 4년 중임 대통령제와 내각책임제에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까지 백가쟁명이다. 대통령과 청와대는 개헌론을 깔아뭉개느라 바쁘다. '세월호 특별법'으로 여야가 치고받은 게 며칠 전인데 느닷없이 개헌론이 튀어나오니 국민이 어리둥절할밖에. 먹고살기 바쁜 장삼이사에겐 생뚱맞기까지 하다. 우리에겐 개헌에 대한 '안 좋은 추억'도 적지 않다. 그러니 개헌에 대한 찬반 양론이 엄존하는 게 사실이다. 들어보면 제각각 일리도 있다.

글쎄, 나더러 말하라면 개헌에 찬성하는 쪽이다. 국민의 기본권 측면에선 현행 헌법이 썩 나쁘지 않다. 지방자치나 경제민주화 조항도 담겨 있다. 헌법재판소도 현행 헌법으로 등장했다. 정권 교체도 경험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1987년 6·10 민주항쟁의 결과물인 현행 헌법의 시효가 다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지우기 어렵다. 국민 생존권 확대를 위한 손질이 더해져야 할 것 같다. 복지국가로의 이행을 위한 국가 시스템을 정비할 필요도 있겠다.

무엇보다 '5년 단임 대통령제'란 권력 구조가 기형적이다. 6·10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이 항복선언을 한 후 구성된 당시 국회 헌법특위가 이렇게 정한 이유는 있을 게다. 4년 중임으로 되돌아가자니 역대 대통령들의 '개헌 장난'이 되풀이될까봐 걱정스럽고 단임을 전제로 임기를 늘리자니 그 직전 7년 단임제였던 전두환 시대의 고통스러운 추억이 반추됐기 때문일 터다. 그래서 단임이면서도 임기를 5년으로 줄여 놓았다. 프랑스처럼 5년 중임제를 채택한 나라도 있지만 중임제는 4년, 단임제는 6년이 일반적이다.

4년 중임제는 중간평가적 선거를 거쳐 재신임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단임제는 잦은 선거에 따른 국가적 혼란과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 어쨌거나 이 체제로 26년쯤 나라를 운영해 보니 몇 가지 문제가 드러난 게 사실이다. 어중간한 임기 때문에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선출 시점이 어긋나는 데다 지방선거까지 보태져 선거가 너무 잦다. 중간 평가가 없으니 대통령이 국민의 뜻을 무시하고 무리한 정책을 편다. 이를테면 이명박 전 대통령의 '4대강 난개발'처럼. '제왕적 대통령'이란 소리가 나오는 까닭이다. 임기 말엔 레임덕이 급속히 덮친다.

요즘 정치권에서 쏟아지는 개헌론을 보면 4년 중임 대통령제는 기본이고 내각책임제도 단골 메뉴다. 국방·외교는 대통령에게, 내치는 총리에게 맡기는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도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를 막자는 명분으로 흘러 나온다. 개헌론을 터뜨렸다가 하루 만에 꼬리(?)를 말아넣긴 했지만 집권당 대표가 물꼬를 튼 데다 야당도 적극적이다. 국회의 개헌추진 모임엔 의원 155명이 가입했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개헌이 금방이라도 성사될 것 같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친박근혜계를 뺀 여당과 야당이 오월동주(吳越同舟)의 형국이지만 사실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이다. 국민들이 개헌론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은 정치적 흑막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 때문이다. 하고 보면 헌법이 집권자의 욕심 때문에 누더기가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 5·16 쿠데타의 결과로 내각책임제를 철폐하고 대통령제로 복귀한 1960년의 개헌, 대통령 3선을 허용한 1969년 개헌, 1972년의 유신헌법…. 게다가 전두환 집권의 문을 열었던 1980년 개헌까지.

여권으로선 '포스트 박근혜'의 대권주자가 시원찮은 게 마음에 걸릴 게다. 김무성 대표가 이원집정부제를 꺼낸 건 대통령 자리를 꿰찰 자신이 없으니 국회에서 뽑는, 실권을 쥔 총리를 노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야당도 마찬가지. 대선에서 벌써 두 번이나 진 마당에 지지율 20%를 턱걸이하고 있으니 2017년 선거인들 자신 있겠는가. 내각제로 바뀌면 국민의 견제 심리 때문에 국회의원을 '만년구짜'로 해먹을 수 있는 데다 혹 연정이라도 성사되면 장관 자리를 얻어걸릴지도 모른다는 부엉이 셈속이 아닐까. 그래도 나중엔 이해관계가 틀어져 죽이네, 살리네 멱살 잡고 싸우기 십상이다. 박 대통령의 반대도 장벽이다. 원론적으로야 국회가 개헌을 발의하고 의결할 수 있지만 한국적 정치 구조에서 대통령의 반대를 무릅쓰고 여당이 개헌을 밀고 나가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 해서 대통령과 청와대가 막아설 일은 더욱 아니다. 대통령이야 자신의 레임덕을 앞당길 개헌 논의가 달가울 리 없다. 세월호 때문에 1년 내내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었던 터에 개헌 태풍에 휘말려 질질 끌려가고 싶지 않은 건 인지상정일 터. 그러나 경제를 살리는 데 방해가 되니 개헌은 입도 벙끗하지 말라는 건 구차한 논리다. 역대 대통령 임기 중 경제가 걱정거리가 아닌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런 식이라면 누가 대통령이 돼도 개헌은 꿈도 못 꾼다는 이야기가 된다. 개헌이 경제의 걸림돌이 아니라 경제가 개헌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참에 시대정신에 걸맞은 새 시스템을 장착한다면 길게 봐서 경제의 디딤돌을 장만하게 되는 게 아닌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일이 아니란 거다. 대통령이 지나치게 개헌을 저지하면 국회의 입법권을 침해한다는 욕을 먹게 된다. 자칫 수레를 막아선 사마귀(螳螂拒轍)가 될 수도 있다. '4년 중임 대통령제로의 개헌'은 대선 공약이니 거부할 명분도 마땅찮다. 개헌 논의는 국회에 맡기고 자신은 그토록 원하는 경제 살리기에 '올인'한다면 개헌이 꼭 경제의 블랙홀이 될 것도 없잖은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후반에 개헌론을 주창했다 무위에 그쳤듯 개헌은 타이밍이다. 대통령의 힘이 빠지고 대선주자들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 또 흐지부지해진다. 이왕 하려면 지금이 낫다. 가장 중요한 건 국민의 의사를 확인하는 것이다. 국민적 요구가 분출하면 대통령이건 국회건 틀어막을 수 없다. 4년 중임제, 내각책임제, 이원집정부제를 포함해 포괄적인 개헌론을 정치시장에 일단 상장해 보라. 국민이란 투자자의 선택을 기다리면 된다. 단, 큰손들이 장난칠 생각일랑 접고 '개미 투자자'들의 의사를 반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