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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선 도시와 누운 도시 /이성희

아파트 건설 붐 유감

탁 트였던 해운대도 벽으로 둘러싸인 삭막한 도시로 변모, 추억·전통은 지워졌다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4-11-19 19:48:15
  •  |   본지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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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 기업에서 대규모로 건설하는 고층의 아파트에 인터넷 청약신청을 내고 근무지가 있는 산복도로 골목길을 내려오는 저녁 길은 왠지 내내 씁쓸하였다. 30년 가까이 다닌 그 골목길에는 가을의 어스름이 아직 머뭇거리고 있었다. 30년 전의 그 담쟁이넝쿨에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을 물들이고 지나가는 바람, 어느 집 부엌에서 저녁상을 준비하는 정겨운 냄새, 수없이 맡아온 진남색 저녁의 빛깔과 향기. 고양이는 졸음 낀 눈으로 행인을 쳐다보고는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오랫동안 몽상하면서 걸어간 길, 그 길을 걸어가면서 씁쓸했던 것은 최근 부산에서 일고 있는 아파트 청약 광풍 때문은 아니었다.

해운대에 산 지가 15년째다. 처음 해운대에 들어왔을 때 우리 가족은 크게 숨부터 내쉬었던 것 같다. 슬쩍 어깨춤을 추듯이 느린 곡선으로 흘러내리며 일대를 껴안고 있는 장산의 스카이라인과 바다를 향해 펼쳐진 전망을 보자 절로 호흡이 툭 트였던 것이다. 그리고 15년 후, 해운대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거대한 수직의 벽이 돼버린 것이다. 장산의 스카이라인은 토막이 나고, 바다를 향한 전망은 거대한 유리벽과 콘크리트로 닫혀버렸다.

예전에 분명 누군가에게 빌려 본 것 같은데 구글 검색을 해도 종적이 묘연한 책이 있다. 책명은 '선 도시와 누운 도시'였던 것 같다. 선 도시를 대표하는 것이 뉴욕이라면 누운 도시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파리라고 했던가. 선 도시는 수직형이며, 누운 도시는 수평형이다. 선 도시가 새로움을 추구한다면 누운 도시는 전통을 존중한다. 수직이 상업적 효율성을 상징한다면 수평은 심미적 안정감을 표현한다. 선 도시의 비전을 제시하면서 근대건축운동을 이끈 이가 르 꼬르뷔지에이다. 그가 디자인한 '빛나는 도시'는 공원과 사방으로 뚫린 고속도로, 초고층 건물로 이루어진 수직의 도시였다. 그것은 뉴욕의 마천루 숲으로 실현되었다. 그러나 피이터 블레이크는 '근대건축은 왜 실패하였는가'라는 책에 뉴욕의 마천루를 기획했던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 독시아데스의 회한에 찬 고백을 싣고 있다. 그는 한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의 가장 큰 죄는 고층건물을 지은 일이다." 초고층건물은 편리하고 행복한 주거 형태이기는커녕 비인간화된 소외의 주거 형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도처에서, 여기 부산에서 경쟁적으로 올라가는 수직의 높이는 상업적 세계의 승리를 오만하게 구가하는 자본의 냉혹한 지배 의지를 보는 것만 같아서 영 마뜩잖다.

르 꼬르뷔지에의 '빛나는 도시'에서 무엇보다 아쉬운 점은 거기에 가로가 없다는 것이다. 이웃이 서로 만나서 인사를 나누고, 여인들은 수다를 떨고, 아기 엄마가 유모차를 밀며 가고, 도시의 산보자들이 몽상 속에서 어슬렁거리는, 그리고 한쪽에 우리를 유혹하는 냄새를 풍기며 갖가지 먹거리의 노점이 늘어서 있는 가로를 그는 수세기에 걸친 과거의 유물이며 기능을 잃은 기관일 뿐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도시에서는 일방통행의 고가 고속도로가 가로를 대신한다. 물론 지금 도시들이 르 꼬르뷔지에의 디자인대로 가로를 없애버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게는 그에 상응하는 소중한 것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것은 우리들의 골목이다.

선 도시의 초고층 건물군을 새로 건설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넓이의 오래된 구역들, 누운 도시의 전통적 구역을 자꾸만 허물어야 한다. 그때마다 오래된 골목들이 사라져 가야 한다. 골목은 도시의 역사이고 서사이다. 그 구불구불 휘어진 길은 숱한 삶의 흔적과 이야기를 품고 있다. '아라비안나이트'는 바그다드의 미로 같은 골목이 낳은 이야기다. 장소에는 지령(地靈), 그 장소마다의 특성을 담은 혼이 있다. 노르웨이의 건축가 노베르그-슐츠의 주장이다. 도시에 지령이 있다면 삶의 흔적과 이야기가 쌓여서 형성된 골목에 있지 않을까. 어쩌면 골목은 이 차가운 도시에 마지막 남은 인문학이며, 인간의 얼굴일지도 모른다. 한 시인은 옛날의 골목에 서서 이렇게 노래했었다. "나는 잠시 골목에 서서/오래된 것은 오래되어서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오래된 친구 오래된 나무 오래된 미래/(중략)/그러나 길도 때로 막힐 때가 있다/막힌 길을 골목이 받아 적고 있다/골목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고 있다고/옛집 찾다 다다른 막다른 길/너무 오래된 골목"(천양희, '오래된 골목'). 골목은 사라지고 있는가, 살아지고 있는가?

지금 부산에 새로 불기 시작하는 아파트 건설 붐은 또 얼마나 수많은 옛 골목을 지워버릴 것인가. 그만큼 우리의 삶에는 추억과 몽상의 휴식이, 그리운 이야기들이 사라져 갈 것이다. 지나치게 수직의 선 도시가 되어버린 해운대를 벗어나볼 요량으로 청약을 신청한 것이 결국 더 많은 수직의 도시를 만드는 데 일조한 셈이 아닌가 해서, 내심 씁쓸하기만 하다. 낮은 창으로 티브이 소리가 흘러나오는 골목길에는 벌써 저녁 바람이 차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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