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사리암 챙기제." "예, 사진도 챙길까예." 신년 벽두인 1월 13일을 하루 앞둔 날이면 사회부 데스크와 부산 사하경찰서 출입기자가 나누는 대화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된 박종철 열사 추모제가 열리는 사하구 괴정동 사리암은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는 장소였다. 당연히 지역 언론사로선 더욱 더 신경을 곤두세우기 마련. 1990년 중반까지 해마다 반복되던 기억 저편 추억의 한 자락으로 남아있는 취재 풍경이다.
고문장소로 악명 높던 서울 남영동분실에서 경찰의 모진 고문으로 숨을 거둔 서울대 3학년생 박 열사. 23살의 젊디젊은 아들을 독재의 폭압에 빼앗긴 아버지 박정기 씨와 어머니 정차순 씨의 피를 토하는 애끓는 모습은 전국을 슬픔에 잠기게 했고 살아 남은 자들에게 무거운 부채의식을 심어주기 족했다.
아버지 박 씨는 임진강에서 사랑하는 아들의 유해를 차가운 겨울 바람에 날려보내며 통곡했다.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버지는 할 말이 없데이"라고 외치며. 어머니 정 씨는 자신이 다니던 사리암에서 딸과 함께 '눈물의 추도 타종'을 하며 오열, 전 국민을 울렸다. '아버지는 할 말이 없데이'는 이후 전국의 민주화 시위 현장마다 등장했다. 시위대 앞줄에 펼쳐진 현수막엔 언제나 이 글귀가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이 고문치사는 부천서 성고문 사건과 함께 5공 정권의 폭압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기록된다. 당시 이를 축소 은폐하려던 검찰수사팀 일원인 박상옥 검사가 대법관 후보로 추천됐다. "탁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변명이 경찰의 고문 수사를 상기시키는 상징어가 됐지만 검찰 역시 고문 경관들이 스스로 다른 가담자가 있다는 진술도 무시하고 조기 종결해 국민적 저항을 부른 치욕적 사건이다.
박 후보자는 사건 이후 검사장급까지 올랐다. 그가 박 열사에 빚진 민주화 시대에 버젓이 국민적 존경의 대상인 대법관 자리를 넘본다. 국회 대법관 후보 임명동의 요청서에 다른 경력과는 달리 이것만 쏙 빼놓기까지 했다. 대법원장이 어떤 기준으로 그를 세 명의 후보 중 최종 추천자로 정했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인사를 민주화 시대에 대법관으로 앉히겠다는 건 또 다른 '87체제' 부정이다. "국민은, 할 말이 없데이." 아직도 국민들은 이런 외침밖에 할 수 없는 존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