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처럼 지극히 낮은 자세로 살지만 거대한 산같은 존재라고 성산(聖山)이란 호가 붙은 장기려 선생. 한결같은 삶을 산 선생이지만 죽어서만큼은 자신의 뜻을 지키지 못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선생이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운명하면서 남긴 두 가지 유언이 이뤄지지 않아서다. 단순히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전 국민이 존경하는 인물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결과였다고 봐야 한다.
선생은 한국전쟁 통에 5남매 중 유일하게 함께 남으로 내려온 둘째 아들이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시신을 화장해 부산 앞바다에 뿌려줄 것'과 '평소 존경하던 외교인 선교사에게 장례예배를 맡길 것'을 당부했다. 국민적 추모 물결 속에 장례 일정이 변경될 수밖에 없었다. 대중 앞에 나서길 몹시 꺼리는 선교사의 입장을 고려해 부랴부랴 다른 목회자가 나서고, 제2고향인 부산 앞바다 대신 경기 남양주 모란공원묘원에서 영면을 취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 슈바이처', '청십자운동 창시자' 등으로 널리 알려진 선생의 발자취는 부산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외과전문의였던 선생은 전쟁통에 영도에서 무료 진료소를 열었고 1951년 복음병원을 개소한 뒤 1959년 간의 70%를 절제하는 간암수술을 성공시켜 오늘의 고신복음병원의 기틀을 다졌다. 1968년부터 시작한 청십자병원 활동은 이 땅에 의료보험제 시행을 이끌었다. 정년 이후 복음병원 옥탑방에서 기거하며 의료 봉사활동으로 여생을 보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3년 취임 직후 한완상 통일부총리를 부산에 내려보내 선생에게 안부를 전할 만큼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이산가족상봉에 얽힌 일화는 선생의 또 다른 인간적 면모를 보게 한다. 1985년 남북 이산가족상봉 등 두 차례 북한 가족을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다른 많은 이산가족이 있는데 나만 가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거절한 것이다.
장기려 선생의 이름을 딴 도로가 부산에 생겼다. 부산 서구청이 선생이 26년간 원장으로 있던 고신복음병원 앞 송도삼거리에서 감천삼거리를 잇는 간선도로 822m 구간을 '장기려로'로 지정했다는 것이다. 인근에 아프리카 수단 봉사활동을 하다 숨진 이태석 신부를 기리는 '이태석 톤즈거리'가 지난해 지정된 바 있다. 이로써 송도 일대가 '봉사하는 의사정신'의 성지가 된 셈이다. 이제 이 성지의 뜻을 널리 알리고 되새기는 건 순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