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편에다 케이블방송까지 다채널시대인 지금과 1980, 90년대 초의 방송환경은 사뭇 달랐다. 신군부정권의 언론통폐합에 따라 TV를 켜면 KBS, MBC만 볼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매일 저녁 9시 메인 뉴스시간 진행자인 앵커는 국민들이 저녁 밥상을 물리고 대하는 국민적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앵커의 전설'인 미국 CBS TV 뉴스 월터 크롱카이트를 본 따 뉴스 진행 자율권을 일정 부분 부여받으면서 우리 사회에도 앵커란 제도가 도입된 시기였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시청률인 40~50%가 나올 정도였으니 이들 앵커의 인기는 대단했다.
선거 때 정치권의 러브콜이 앵커에 몰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집권한 문민정부 시절 치러진 15대 총선(1996년)은 앵커정치인 전성시대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였다. 집권 여당인 신한국당과 김대중 총재의 새정치국민회의가 앵커 맞불 작전으로 선거를 이끌었다. 여당이 KBS 출신 앵커인 박성범, 이윤성을 영입하자 야당은 MBC 정동영 앵커를 새 피 수혈이라며 대항마로 내세웠다. 지상파방송만 있던 시절 인지도에 힘입어 이들 3인방은 무난히 여의도 의사당에 입성했다.
앵커 문화를 잉태한 미국에선 앵커가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것은 경계 대상이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와 정반대 일이 있었다는 점이다. 1997년 5월 수전 몰리너리 하원의원이 "TV 앵커야말로 정말 하고 싶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이라며 CBS 뉴스 앵커행을 밝혀 미 정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CBS가 시청률에서 경쟁사인 NBC에 뒤지자 정치가문 출신이자 4선의 39세 여성 의원을 깜짝 발탁해 "매우 지적이고 설득력 있는 말솜씨를 갖고 있어 앵커로서 적임자"라고 소개하며 승부수를 걸었던 것이다.
정치에 입문한 지 햇수로 20년째인 정동영 전 의원이 그제 서울 관악을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제 1야당을 대체하는 대안 야당, 대중적 진보정당의 건설을 위해 몸을 던지겠다"는 출사표와 함께. 앵커 출신인 그는 15, 16대 연이어 전국 최다득표 당선자란 영광을 안았다. TV에 비친 그의 이미지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수치다. 2009년 지역주의 타파를 내건 당의 대의도 외면하고 무소속으로 전주에 출마한 그다. 야당 대권후보까지 지낸 정동영이 가는 길이 앵커로 기억하는 이들에게 수긍하기 어려운 행보로 이어진다. 앵커 정치인의 한계인가. 야당 정치인의 한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