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경북 고령)가 신라 장수 이사부에 무릎을 꿇고 망한 562년(진흥왕 23년) 이후 가야 세력은 역사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하듯이 신라가 앞서 532년(법흥왕 19년)에 금관가야(경남 김해)를 무너뜨리고 자기 세력권에 넣었다는 등 가야 패망사만 있을 뿐 가야 연맹체에 대한 기술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옛 가야의 실체를 들여다 볼 문헌사료가 불비한 이유다. 1970, 80년대 가야 고분들에서 화려한 금동 및 철기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가야의 높은 문화수준이 주목되면서 그나마 역사적 공백을 메울 수 있었다.
가야 세력 스스로의 기록이 없다보니 초기 가야 명칭도 이웃 나라의 기록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 장수왕이 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광개토대왕비에 '400년 왜의 침입을 물리쳤다'는 내용에 나오는 임나(任那)가 최초 기록이다. 임나가 가야라는 데는 뜻을 같이하면서도 우리나라와 일본의 해석에는 다소 차이가 난다. 우리는 삼국사기를 근거로 임나가야(任那伽倻)의 줄임말로 금관가야로 본다. 일본은 일본서기에 바탕해 가야의 여러 연맹체를 통틀어 일컫는 표현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문헌기록이 빈약하다보니 남겨진 기록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한 역사적 왜곡이 '임나'를 중심으로 자행됐다. 그 대표적인 게 일본 고대 야마토(大和) 정권이 4세기 후반 가야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이다. 광개토대왕 비문의 초기 탁본을 중심으로 일본이 이런 주장을 펼쳤다. 이의 부당성을 알린 이는 부산 강서구 녹산 출신의 재일 사학자 이진희 선생이다. 1972년 '광개토왕비문의 수수께끼'란 연구 논문에서 선생은 일본이 비문에 석회를 발라 글자를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물론 동북공정에 열을 올리는 중국까지 가세해 이 비문 연구가 활발해졌다.
일본 문화청이 삼국시대 일본으로 흘러들어간 유물들에 최근 임나시대 유물로 표기했다는 소식이다. 사실과 달리 유물 몇 점으로 우월감을 고취시키려는 유치한 발상이다. 잠잠하던 임나일본부설을 기정사실화하려는 사전 움직임으로도 보인다. 2003년 양국 학자들 사이에 이 문제를 두고 논의한 끝에 실체가 없는 것으로 결론난 사안이다. 하기야 피해자가 엄연히 생존해 있는 종군위안부 문제도 부인하는 일본 정부다. 그런 일본이니 1500년 전 역사 왜곡쯤이야 여반장이 아닐까 싶다. 역사에서 배우기는커녕 왜곡하는 나라가 좋은 이웃이 될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