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년 전 오늘, 1592년 음력 4월 18일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엿새째였다. 부산진성 다대포진 동래성을 나흘 전 한나절 만에 무너뜨린 왜군이 여세를 몰아 김해성 공략에 한창 열을 올렸던 즈음이었다. 파죽지세 전황에 왜군이 얼마나 기고만장했을지 눈에 선하다. 그러잖아도 보릿고개를 넘느라 힘겨웠던 부산 경남 백성은 왜병 노략질에 겹고통을 겪었을 터이다. 4세기가 지난 지금 생각해도 울화가 치민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등져 무기력했던 조선 조정은 영토와 백성을 지킬 수 없었다. 이때뿐인가. 정유재란(1597년)을 낀 7년간 왜란(1592~1598년), 두 차례 호란(정묘·1627년, 병자·1636년), 35년 동안 일제 강점(1910~1945년), 3년간 한국전쟁(1950~1955년)이 이어졌다. 그 결과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이 됐고 휴전 중이다.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란 호란은 마침표를 찍은 걸까.
일본은 '신임진왜란'을 수행 중이다. 그들이 근현대 후 보인 대(對)한국 외교 행태를 보면 그렇다. 왜란 때처럼 '총칼'을 들 수 없으니 역사 왜곡, 영유권 시비 따위로 포연 없는 전쟁을 벌였다. 한반도를 수탈한 역사를 청산하지 않은 채 독도를 일본 영토라 억지를 부린다. 한국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생존했는데도 그 사실을 부정했다. 우경·군국화를 좇는 아베 정부는 그런 자국 외교 악습을 보란 듯 실천에 옮겼다. 군함도를 포함해 몇 가지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실으려는 최근 작태가 대표 사례다. 그 인공섬은 징용당한 우리 선조가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가 뼈를 묻은 인권 수탈 현장 아닌가. 이 한 맺힌 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삼겠다는 건 선전 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중국 역시 호란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한국을 압박해온다. 그들이 우리 코앞에 내민 무기 중 하나가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다. 자신들이 주도할 새 아시아 개발기구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다. 미국 일본이 주도하는 세계은행(WB)과 아시아개발은행(ADB)에 맞서게 될 AIIB가 오는 연말 출범하면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칠 게 분명하다. 한국은 지난 3월 말 가입을 결정해 신경제 시장에서 나올 '파이'를 나눌 자격을 얻긴 했다. 문제는 그 파이를 굽는 주방장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제1 국가를 꿈꾸는 중국이라는 점이다. 미국과 동맹해야 할 박근혜 정부는 께름칙하다. 수년 전부터 미국이 선전해온 대당 2조~3조 원짜리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가 눈에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미국 측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는 사드를 남한에 배치해야 한다는 속마음을 감춘 외교 수사라 봐야 한다. AIIB 가입이나 사드 배치는 비용·수익을 결정하는 대형 '전전(錢戰)'인 만큼 진퇴 결정이 쉽잖다. G2인 미국 중국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면서 일본과도 줄다리기해야 하는 한국은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여기에다 럭비공 같은 북한까지 상대해야 하니 셈법은 더 복잡하지만 한국이 주권국가로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취해야 한다는 목표만은 놓칠 수 없다.
이 대목에서 423년 전 난세에 빠진 조선을 지켰던 충무공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세계 해전 역사는 충무공을 적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잘 알았던 지략가로 기록했다. 반면 우리는 그를 외침을 막아낸 민족 영웅이며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닌 '전설'로 받들면서 정작 실체는 직시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해군사관학교가 공개한 충무공 자료 중 하나로 임원빈 전 교수가 쓴 칼럼들은 현대에 적용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충무공 병법과 리더십'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임 전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충무공은 명량·한산 해전을 제외한 거의 모든 해전에서 병력 집중을 통해 항상 우세한 상황에서 해전을 치렀지 열세이거나 불리한 해전은 절대로 벌이지 않았다." 전장에서 부하를 가장 아끼는 방법은 무엇인가. 승리를 보장하는 전세로 부하 목숨을 보호하는 일임을 충무공은 절감하고 이를 실천했다.
근대 이후 국가 간 무력 충돌이 급감했을 뿐 외교 무대나 경제·문화 현장 같은 나머지 부문에서는 포성 없는 전투가 잇따른다. 포악한 승리자가 되어선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처량한 패배자로 전락할 수는 없다. 전장에서 이기는 '충무공 병법'을 갖추고 있는지 점검해봐야 한다. 정치인들은 외교 현장에서 능력을 발휘할 인력을 키우는 법안 하나라도 더 만들어라. 학부모라면 선열들 희생이 어떠했는지 밥상머리 교육이라도 한번 할 일이다. 유월은 나라를 생각하며 피를 데우는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