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향의 땅' 사할린의 한인들이 1989년 9월 한민족체육대회에 참석했다. 40여 명이 특별전세기 편으로 유지노사할린스크에서 서울을 찾았다.
해방 이후 꿈에도 그리던 고국땅을 밟은 첫 사할린 동포들이라 국민적 관심이 컸다. 게다가 적성국 소련 땅에서 직항기로 왔으니. 이 일은 꽁꽁 얼어붙은 양국 관계를 해빙시킨 상징적 사건이 되면서 1년 후인 1990년 9월 역사적인 한·소 수교의 전령사 역할을 해냈다.
사할린이란 말은 '흑룡강 맞은편의 섬'이란 뜻의 만주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가라후토(樺太)라는 일본식 표현은 원주민 아이누족이 '아무르(흑룡)강 어귀에 신이 만든 섬'이라 부른 데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사할린은 일본과 러시아 제국주의 틈바구니에 끼어 아픈 역사를 간직한 땅이다. 근대까지 러시아 죄수들의 유배지였다가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북위 50도 선을 잘라 남쪽을 차지하면서 둘로 나뉘었다.
일본의 사할린 경영은 식민지 백성에게 또 다른 고통의 예고편이었다. 석탄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사실을 안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주요 전수물자 공급지로 삼으며 식민지 백성을 이곳으로 내몰아 노동력을 착취했다. 많은 이 땅의 청년이 혹한의 땅에서 이산의 아픔에다 가혹한 노동환경에 시달려야 했다. 1939년 모집 형태로, 1942년 관 알선 형식으로, 1944년 강제징용 방식이었다고 일본 측은 강변하나 식민지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 '강제이주'라 하겠다.
그토록 고대하던 고국이 해방되었지만 이들은 '잊혀진 한인'이었다. '사할린 아리랑'에는 이들의 아픔이 절절하게 묻어있다. '··· /풍파 사나운 바다를 건너/ 한많은 남화태 징용왔네/ 아리랑 아리랑 아리리요/ ···/ 철막 장벽은 높아만 가고/ 정겨운 고향길 막연하다'.
사할린 주도 유지노사할린스크에 '사할린 한인 역사기념관' 건립이 추진된다. 부산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가 현지 한인회와 손잡고 희생자 추모, 역사기록공간 등을 갖춘 역사기념관을 세우기로 하고 모금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사할린 한인사는 이민족에 의해 자행된 뼈아픈 약소 민족의 강제 이주역사다. 이를 현지에 정확히 기술하고 알리는 작업은 동포들의 영구귀국 못지 않게 중요한 민족사업이다. 그 자체가 일제의 만행기록이자 현지 한인들에겐 든든한 뒷배가 될 수 있기에.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국민 모두 백지장을 맞들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