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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관 칼럼] 간신(諫臣)과 '간신'

조선 충신 박태보 전제군주에 맞서 원칙 앞세우다 목숨 잃어

절대권력 없는 민주공화국시대, 올바른 신하는 남아있는가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6-01-28 19:45:17
  •  |   본지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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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9년(숙종 15) 5월 4일 진도(珍島)로 귀양 가던 박태보(朴泰輔)가 과천에서 죽었다. 그는 '사변록(思辨錄)'의 저자로 유명한 박세당의 아들이다. 소론 명문가 출신으로 출세가 예정되어 있던 39살 젊은이가 귀양 가던 길에서 죽다니, 어쩐 일인가.

열흘 전 오두인(吳斗寅) 등 86명이 숙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출하려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29살의 젊은 왕은 아들(뒷날의 경종)을 낳아준 장희빈에게 빠져 정비(正妃)인 인현왕후를 내쫓고자 했던 것이다. 유교국가에서 왕이 별다른 이유 없이 정처를 축출하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돌이켜 보면 과거 성종이 정비 윤 씨를 서인으로 폐출(廢黜)한 것이 연산군 때 사화(士禍)의 원인이 되어 사림들이 목숨을 잃었던 전사가 있었다. 신하들은 물론 반대했다. 하지만 조심스러운 말로 에둘러 말했을 뿐이었다. 대놓고 정비 폐출은 불가하다고 말한 상소는 오두인 등의 상소가 처음이었다.

젊은 왕은 분노했다. 당장 친국(親鞫)을 하겠다면서 오두인 등을 잡아다 대령하라고 길길이 뛰었다. 역적의 옥사가 아니므로 친국은 할 수 없고, 또 한밤중이라서 잡아오기 곤란하다고 신하들이 말렸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막무가내였다. 호령에 놀란 신하들이 후다닥 뛰어나가 오두인을 잡아왔다. 오두인을 다그쳤더니 그는 관례에 따라 '한문'으로 답했다. 성질 급한 왕은 그냥 '말'로 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누가 상소문을 썼느냐?"

"박태보입니다."

박태보가 잡혀왔다. 분노가 꼭지까지 찬 왕은 박태보를 고문하기 시작했다. 원래 국문(鞫問)의 순서는 물어볼 것을 하나하나 물어보고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거나, 거짓말을 한다고 판단되었을 때 형장을 치는 것이다. 하지만 분노한 왕에게 그런 정상적인 절차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왕은 원래 법 위의 존재니까 말이다. 박태보는 자신이 상소를 썼다고 답했고 어떤 변명도 늘어놓지 않았다. 아니, 그는 오두인에게 자신이 상소를 쓴 것이 사실이니 뒷날 문제가 될 때 그대로 답하라고 미리 말해 두었다. 박태보는 자신은 왕을 기만한 적도, 잘못을 저지른 적도 없기에 자신의 죄를 인정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도리어 숙종이 정비를 내쫓는 것이 잘못임을 계속 환기시켰다.

박태보의 침착하고 조리 있는 답변에 숙종은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아니, 그런 박태보에게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법에 정해진 절차와 순서 따위는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몽둥이로 입을 치라고 했고, 이어 빨리 죄를 인정하라고 다그쳤다. 무슨 죄를 인정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박태보의 답에 다시 말문이 막힌 숙종은 박태보가 자신을 속였다고 했지만, 그 역시 근거 없는 소리였다.

숙종의 입에서 "맹렬히 치라"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살갗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고통 속에서도 박태보는 조근조근 답했고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성을 잃은 왕은 압슬(壓膝)과 낙형(烙刑)을 베풀라고 명했다. 사금파리를 깔고 그 위에 사람을 꿇어앉히고 무릎 위에 돌을 얹는 것이 압슬이다. 낙형은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살을 지지는 것이다. 박태보는 숙종이 자신을 죽이려는 것을 알았다. 역적에게 가하는 이 법 밖의 악형을 왜 자신에게 가하느냐고 묻자 이 정신 나간 전제군주는 "너는 역적보다 더하다"고 답했다.

박태보의 옷이 벗겨졌고 벌겋게 달군 쇠꼬챙이가 그의 몸을 두 차례 유린했다. 원래 압슬과 낙형은 열세 번을 한 차례로 친다. 숙종의 쇠꼬챙이는 박태보의 몸을 26번 지진 것이다. 인간이 느끼는 가장 큰 통증은 작열통(灼熱痛), 곧 몸이 불에 탈 때 느끼는 고통이다. 이 혹형, 아니 악형에도 박태보는 신음소리만 내었을 뿐 정신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악형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의 신체는 열흘 뒤 그의 정신을 더는 담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진도로 귀양 가는 길에 과천에서 정신이 육신을 떠나고 만 것이다.

노론 송시열은 소론인 박태보·박세당과 정적이었다. 서로 비판하고 공격하는 등 관계가 험악했다. 하지만 송시열은 박태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손자 주석(疇錫)을 불러 "박태보와 관계된 문자는 모두 불에 넣으라"고 말했다. 그를 비난한 모든 기록을 없애게 한 것이다. 또 특별히 소식(素食)을 하고 자손들에게 그의 이름을 부르지 말게 하였다. 정적도 박태보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 사족체제는 유교적 가부장제 위에 서 있었다. 아비와 자식, 장자와 차자, 남자와 여자, 적처와 첩을 엄격히 구분하는 유교적 친족제도가 밑바닥에서 사회를 지탱하고 있었다. 첩이 아무리 사랑스럽다 해도 첩일 뿐이었다. 첩 때문에 정처를 내쫓을 수는 없는 법이다. 유교적 가부장제는 비유컨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란 헌법 제1조와 같은 것이다. 체제의 근거를 왕이 무너뜨린다고 판단했을 때 박태보는 항거하면서 자기 목숨을 내놓았던 것이다. 다른 신하들처럼 침묵하거나 온건히 에둘러 말했다면, 박태보는 소론 명문가의 자제로 출셋길을 달릴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는 편하고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고, 원칙의 길을 걸어 죽음을 택했다.

박태보를 죽였을 때 숙종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그가 박태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었던가. 인격과 학문도 세상경험도 그 어느 것도 박태보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왕이란 그런 존재다. 남보다 빼어나게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고, 도덕적이지도 않고(아니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정치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왕의 자식으로 태어나 왕의 자리에 올랐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절대권력을 쥐고 있는 존재다. 정말 해괴하지 않은가. 박태보는 자신이 섬겼던 군주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한 간신(諫臣)이다. 지금 세상은 군주국이 아니고 이른바 민주공화국이지만, 세상의 근본 이치야 다를 것이 무어 있겠는가? 정말 간신(諫臣)은 없는 것인가? 아니면 혹 '간신'만 있는 것인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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