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가 한국에 바람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당연히 독서 목록의 앞 자리를 차지했다. 이 책을 산 것은 고백건대 일종의 의무감 내지 과시욕의 발로였지 싶다. 호기롭게 책을 펼쳐들었으나 10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밀쳐버리고 말았다. 남들은 세기의 지성 에코가 어떻고 '장미의 이름'이 베스트셀러가 됐다느니 하는데 30분도 눈길을 줄 수 없었으니, 그 자괴감이란.
1년쯤 지났을까. 굴욕을 만회하겠다는 심정으로 '장미의 이름'을 집어들었다. 도전은 또다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기억 속에서 거의 잊혀진 '장미의 이름'을 다시 집어들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같은 이름의 영화였다. 주인공 윌리엄 수사 역을 맡은 배우 숀 코너리의 매력에 빠진 까닭도 컸다. 윌리엄 수사는 혼자 중세시대의 어둠과 싸우는 듯한 인상을 줬다. 그가 가진 무기는 방대한 지식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력이다. 14세기 중세시대 수도원 살인사건을 17세기 뉴턴이 등장해 해박한 지식으로 과학 수사를 벌여 범인을 잡아내는 모습이라고 할까. 그 윌리엄 수사가 바로 에코 자신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탈리아 태생인 그는 탁월한 기호학자 철학자 역사학자이자 소설가이다. 작가로서, 비평가·인문학자로서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는 2005년 '프로스펙트/포린 폴리시' 조사에서 노엄 촘스키에 이어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 2위에 올랐다. 에코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린 것은 1980년 펴낸 첫 소설 '장미의 이름'이다. 이 작품은 40여 개 언어로 번역돼 5000만 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세계적인 초베스트셀러인 셈이다. 8년 뒤 출간된 소설 '푸코의 진자'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정작 에코는 자신은 어디까지나 철학자이며, 소설 쓰기는 그저 주말 시간을 할애하는 아르바이트 같은 것이라고 했다나.
암 투병 중이던 에코가 84세를 일기로 엊그제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세계는 '시대 지성'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이 자못 크다. 하지만 그가 남긴 30여 종의 저서는 지성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지적 욕구의 자극제로 길이 남으리라. 지성의 상징인 에코에게 보낸 한국인의 애정은 남다르다. 출판사 열린책들의 '에코 마니아 컬렉션'은 본국 이탈리아에도 없는 세계 유일의 에코 총서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욕심을 내 사긴 했으나 읽지 않고 책장에 모셔두었던 에코의 저서를 꺼내 다시 도전하는 이가 많을 듯하다.
조송현 논설위원 pin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