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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칼럼] 한순간 훅 간다 /박창희

새누리당의 백보드, 살생부 논란과 오버랩

격한 말장난보다는 '삶의 마디' 성찰을

  • 국제신문
  • 대기자 chpark@kookje.co.kr
  •  |  입력 : 2016-03-03 19:22:44
  •  |  본지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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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차리자 한순간 훅 간다'.

절묘한 문구다. 흥미로운 카피다. 음미할수록 말맛이 짜릿하다. 유머인가 했더니 그게 아니다. 아뜩한 생존의 절벽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엊그제 새누리당은 회의실 백보드(배경막)를 이 문구로 바꾸었다. 복잡한 시국과 당내 갈등, 4·13총선을 겨냥한 다목적 포석일 테다. 새 백보드가 공개되자마자 검색 인기어로 떠올랐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다'는 카피로 유명해진 조동원 새누리당 홍보본부장의 작품이란다. 새누리를 향한 국민의 쓴소리를 SNS로 공모하고 그것을 백보드에 캐치프레이즈처럼 둔갑시켰다. 당 안팎에서 살생부(殺生簿) 논란이 불거진 직후라 묘한 콜라보를 연출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도 정치행위라고 보면 이해 못할 건 없다. 국민들의 시선을 끌면서 경각심을 갖게 한다는 점에선 '절묘한 한 방'이란 생각도 든다. 문제는 진정성일 것이다. 공감은 끌어낸 것 같은데 소통은 글쎄다. 진지한 성찰과 자기 경계, 변화의 모습을 담았다고 보기엔 뭔가 객쩍어 보인다.

사전에는 '훅 간다'는 말이 없다. 흔히 쓰는 속어로 보면 될까. 그 뜻은 '곧장 사라진다' '나가 떨어진다' 혹은 '원샷 원킬' 정도로 풀이될 듯 하다. 어쨌든 '훅 간다'는 말은 표현은 화끈할지 모르나 좋은 의미는 아니다. 역사의 기억은 처절하다.

1453년, 계유정난을 기획한 책사 한명회. 그는 닷새 동안 혼자 골방에 앉아 살릴 자와 죽을 자, 즉 생살부(生殺簿)를 만들어 수양대군에게 바친다. 김종서, 황보인 같은 단종의 충신들이 한명회가 놀린 붓끝에 따라 철퇴를 맞고 피를 토한다. 떠올리기조차 싫은 참혹한 정변이다. '한순간'에 충신들이 훅 가버렸고 역사가 바뀌었다.

560여 년 전의 역사 한 조각이 유령처럼 정치권을 흔든다. 선거 때만 되면 불거지는 살풍경이다. 진박과 비박으로 나뉜 새누리당의 권력투쟁은 한명회조차 입을 벌릴 지경이다. 여기에 '한순간 훅 간다'는 경구가 물 만난 고기처럼 퍼덕거린다.

한순간 훅 가는 게 어디 정치뿐이던가. 그런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잘나가던 기업인이 길을 잘못 들어 한순간에 쇠고랑을 차고, 유능한 관료가 이권에 얽혀 한순간에 패가망신한다. 음주운전으로, 졸음운전으로 한순간에 생명을 잃기도 한다. 사회나 국가라고 다르지 않다. 천하의 삼성이나 현대도 자기 경계에 소홀하거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이다.

'한 방에 훅 간다'는 말이 노동자들에게는 생존 절벽으로 인식될 수 있다. 비정규직들이 당하는 열악한 처우와 상시 불안, 명예퇴직·희망퇴직이란 미명으로 시행되는 구조조정은 한국사회의 아픈 단면이다. 이 땅의 수많은 '미생'이 오늘도 고용 불안에 떤다. 역사를 뒤흔들고 정치인들을 떨게 하는 살생부의 공포를 노동자들은 거의 일상적으로 느끼며 산다고나 할까.

한순간 훅 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사회심리학자 김정운이 쓴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21세기북스)는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스스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더 망가져 있습니다. 대한민국 성공한 사람들은 거의 다 만나봤습니다. 대부분 정상이 아닙니다. 본인만 모릅니다. 상식적으로 한번 생각해봅시다. 그 위치까지 가려고 도대체 얼마나 미친 듯 살았겠습니까? 얼마나 이를 꽉 물고 버텼겠습니까? 그런데도 자신의 몸과 마음이 형편없이 망가져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주위 사람들은 다 압니다. 그가 가진 돈과 권력 때문에 아무 말 하지 않을 따름입니다. 그러다가 다들 '한 방'에 훅 가는 겁니다…'.

서글픈 현실 진단이다. 저자는 한 방에 훅 가지 않으려고 사람을 만나고 공부하고 돈을 번다고 했다. 그는 '굵고 짧게' 살기보다 '가늘고 길게' 살 것을 주문한다. 태풍에 뿌리째 뽑혀 자빠져 있는 나무는 대부분 아름드리 나무다. 그 엄청난 두께의 나무들이 아주 간단히 쓰러진다. 폼 나 보이지만 의외로 쉽게 무너진다는 이야기다. 반면 매듭이 많은 대나무는 약해 보여도 태풍이 와도 잘 견딘다. 삶의 마디를 자주 만들어 자기 삶의 주인이 돼라는 조언이다.

새누리당이 써붙인 '정신차리자 한순간 훅 간다'는 말에 공감하면서도 소통 부족을 느낀 건 이 같은 성찰과 경계를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을 너무 '격하게' 하는 것 같다. 격한 말은 한때의 정치적 유행어는 될지 모르지만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 격한 말에 피눈물 흘리는 국민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정치권이 정작 부르짖어야 할 것은 '한 방에 훅 간다'가 아니라, '훅 가는 일이 없는' 사회 분위기 조성이다. 말장난이 과하면 안 된다. 위기 모면용으로, 국면 전환용으로 진정성 없이 '훅 간다'는 말을 남발하다간 진짜 '훅 갈' 수도 있다.

대기자 chpark@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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