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6일 동안 보여준 방한 행적은 기승전결을 갖춘 한 편의 완벽한 드라마 같았다. 누군가는 그가 "나 대통령 출마하겠소"라고 말하지만 않았을 뿐 할 얘기 다 한 거 아니냐고 했다. 그러고는 뒤돌아서 손을 휘휘 내젓는 모습에서 프로 정치인을 보는 것 같다고도 했다. 정교하게 짜여진 듯한 각본과 연출을 통해 '반기문 대망론'이라는 불씨를 국민 앞에 툭 던져놓고 무심한 척 다시 출국하는 모습도 놀라웠다고 입을 모은다.

방한기간 그는 작심한 듯했다. "내년 1월 1일 한국 시민으로 돌아오면 결심을 밝히겠다." "미국 대통령(후보) 나온 사람들을 보면 민주당은 전부 70세, 76세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파서 결석한 적이 한번도 없다." 관훈클럽 제주 간담회에서 나온 반 총장의 말이다. 앞의 답변은 "대선 출마에 대한 입장을 밝혀달라"는 질문에, 뒤는 "대선 후보로 나서기에는 연령(대선이 있는 내년 그의 만 나이는 73세다)이 많다는 지적도 있는데 자신의 건강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라는 물음에 대한 그의 입장이다.

일반인이라도 대선 후보 물망에 단골로 오르는 인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듣는다면 "어, 이 사람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말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물며 기자 경력 20~30년의 중견 언론인들의 예민한 촉수가 이런 말을 그냥 넘길 리가 만무하다. 대선에 출마하겠다는 말을 에둘러서 이보다 더 어떻게 노골적으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매일 전 세계 언론인들을 만나고 있는 그가 기자들의 생리를 모를 리 없다. 더구나 그는 말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직업 외교관이다. 결국 반 총장은 치밀하게 계산된 발언을 통해 방한 첫날 '반기문 대망론'의 애드벌룬을 성공적으로 띄워 올린 것이다.

그래놓고는 슬쩍 뒤로 한 발 뺐다. 언론이 너무 앞서 나갔다는 거다. 전형적인 치고 빠지기식 전술이다. 어제 뉴욕으로 출국하기까지 그는 애드벌룬을 매단 줄을 풀었다 감았다 하면서 언론을 노련하게 이용했다. 그리고 그는 유엔 사무총장 임기가 끝나는 올 연말까지 앞으로 7개월간 태평양 건너 뉴욕에서 여의도의 대권 기상도를 읽으며 정교한 수읽기에 들어갔다고 봐야 한다.

후배 외교관들이 반 총장에게 붙여 준 별명은 '반반(潘半)'이다. '반(潘)기문의 반(半)만 해도 성공한다'는 뜻이다. 외교부 후배들이 보기에 반 총장의 실력이 그만큼 출중하다는 뜻이란다. 그런데 정치권에선 '반반(半半)'으로 읽는다. 대통령에 나올지 말지, 여당으로 나올지 야당 후보로 나올지 등 모든 게 반반이라는 풀이다. 모든 게 애매하고 누구에게도 책 잡히지 않는 그의 어중간한 처신을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다.

사실 국제외교가에서 그의 별명은 따로 있다. '기름 장어'다.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 외교보좌관을 맡던 시절 까다로운 질문이나 복잡한 상황을 미끌거리는 장어처럼 잘 빠져나간대서 언론이 붙여줬다.

"그는 유머가 있고 유연하기도 했다. 외교부-국가안전보장회의(NSC) 간부 합동 만찬에서 그의 유머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한 번은 반 장관이 다른 장관들에게 외교관을 무어라고 부르는지 아느냐고 퀴즈를 냈다. 외교관이 아닌 우리는 알 리가 없었다. 반 장관이 '기름 바른 장어'라고 해서 박장대소한 적이 있었다. 외교관은 '요리 빼고 저리 빼며 잘 빠져나가는' 처신을 한다는 뜻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것이다."(이종석 전 통일부장관 회고록 '칼날 위의 평화' 중)

'반반(潘半)'이건 '반반(半半)'이건 '기름 장어'이건 일맥상통하는 건 그가 대단히 영리하고 정교하며 치밀하게 계산된 발언과 행동을 한다는 점이다. 결코 허투루 말을 내뱉거나 의미 없는 행동을 하는 법이 없다는 게 별명에 들어 있다.

그의 대선 데뷔 무대는 성공적이다. 방한 기간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대선주자 중 1위로 성큼 올라선 것만 봐도 이벤트는 대성공이다. 더구나 지난 총선에서 참패한데다 대선 주자들이 멸종하다시피 한 새누리당의 친박계가 그를 꽃가마에 태우고 싶어 안달이다.

도전은 이제부터다. 그의 앞길은 꽃길보다는 가시밭길일 가능성이 크다. 우선 평생을 관료이자 외교관으로 살아온 그다. 지금까지 온실에서 살았다면 정치인으로 산다는 건 작두 날 위에 서는 것이나 다름없다. 서슬 퍼런 후보 검증과 전쟁터 같은 여의도 정치에서 살아남을 수 있느냐는 그의 몫이다. 무엇보다 그는 국민적 통합을 이룰 복안과 경제나 민생, 남북 분단과 통일 등의 문제에 대해 정치적 리더로서 대한민국이 나갈 비전을 한 번도 국민 앞에 보여준 적이 없다.

별명인 '반반' 대로 대선에 나오든 말든 최종 선택은 그의 몫이다. 오늘 한반도 상공에 둥실 떠 있는 애드벌룬이 내년에도 창공에 그대로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애드벌룬의 바람이 빠지는 건 한순간이다.

논설실장 song@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