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개원 기념으로 연초에 기획한 대장항문 세미나가 큰 성황을 이루었다. 원래 목적은 영남권 대장항문 의사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함이었고, 의학적 교류와 진보를 이루어가는 장으로 발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외국의 우수한 의사들도 초빙하였다. 세미나는 치질 수술의 역사와 기본에서부터 시대의 흐름에 맞는 진전된 선택적 수술기법에 이르기까지 핫이슈로 구성되어 대다수 참석자가 만족하였다.
초청자 중 호주 의사 대런(Darren)은 우연히도 나와 생일이 같았다. 우리는 생일을 호주에서 같이하자는 다소 엉뚱한 약속을 하게 되었고 아내와 난생처음 지난달 호주를 방문했다. 때마침 동반한 중국 광둥 성의 대장항문학회장인 동린(東林) 부부도 함께했다. 출국 하루 전까지 병원의 격무에 시달리던 나에게 결혼 26년 된 아내와의 첫 여행은 다소 생뚱맞고 어색한 일이었지만 병원 일을 일주일 넘게 떠나 있기로 작정하게 된 데는 나름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병원 일에 파묻혀 50대 중반을 넘기게 되어 "나는 힘든 외과의사 생활을 왜 계속하고 있을까?" "나는 과연 어디에 서 있나?" 등등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싶었다. 또 "우리 병원에 병원장인 내가 없다면?" 하는 궁금증도 있었다. 물론 OECD 선진국인 호주의 의료시스템을 관찰하고 싶은 호기심도 함께 작동했다.

시드니 킹스포드 스미스 공항은 생각보다 그 규모가 작아 의외였으나 많은 여행객을 순식간에 자동 출입국관리시스템으로 처리하였다. 출입국 관리직원이 내가 한국인임을 알아보고 "안녕하세요, 빨리빨리"라고 하여 묘한 웃음을 자아냈다.

일행이 방문한 병원 중 브리즈번의 QE II 쥬빌리병원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첨단 정보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수술실과 회의실에서 화상토론이 가능했고 고가의 최신 수술 장비가 널려 있었다. 호주의 의료 시스템이나 의료 수가는 우리나라에 비해 상당히(?) 의사들 위주로 책정되었고 의사들 역시 제법 경제적 여유가 있어 보였다.

호주 현지 병원에서 수술 시연과 심도 있는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브리즈번에서 개최된 세미나에서는 2차례 발표와 함께 패널 토의를 진행하게 되었다. 호주의 대장항문 수술의 역사가 깊지 않아 전국을 통틀어 항문수술 전문의가 한 사람밖에 없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수술경험이 우리에 미치지 못하여 몇 가지 수술기법과 노하우를 알려주기도 하였다. 호주 의사들은 우리 병원의 수술 실적과 수술 동영상에 크게 흥미를 보였고, 내가 발표한 이후 태도가 달라지고 호의적으로 대해줘 매우 융숭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나의 호주 방문은 우리의 수술기술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의사의 길을 걷게 된 지 30년을 훌쩍 넘어 부산 유일의 외과 전문병원으로, 대장항문 전문병원을 이루기까지 힘들고 어려웠던 사연이 숱하다. 지금은 환자가 찾아오는 병원이 되었지만 초기에는 암수술 스케줄을 잡아두면 서울의 대형병원으로 가겠다고 갑자기 보따리를 싸는 환자들 때문에 당일 수술 스케줄이 엉켜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대접받지도 못하면서 걸핏하면 큰 병원만 찾고 무작정 서울로 가버리는 우리 이웃들. 그런데 우리의 수술기술은 우리나라보다 외국에서 더 인정받는다.

다행히 우리 병원은 내가 없이도 잘 버티고 있었다. 호주에 같이 갔었던 중국의사 동린에게서 연락이 왔다. 광둥 성에서 열리는 학회에 연제를 두어 개 맡아 달라는 요청이다. 호주에서 한 발표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진료할 환자가 많은 개원의사로서 쉽지 않은 일정이지만 어쩌면 국위 선양의 방법일 수도 있겠다 싶어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나 내게는 그 무엇보다 지역의 의료발전이 더 중요하다. 칼잡이 외과의사로서 지역주민의 칭찬과 사랑에 더 감동하고 큰 보람을 느낀다.

부산 항운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