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닭은 문무용인신(文武勇仁信)의 오덕(五德)으로 칭송받았다. 붉은 벼슬은 문의 기상이요, 날카로운 발톱은 무의 위엄이다. 싸움에 물러서지 않으니 용이요, 먹을 때 서로 부르니 인이며, 밤을 지키며 때를 놓치지 않으니 신이다. 도둑에도 도가 있고 매미에도 덕이 있다고 하니 닭이야 새삼 말할 바도 없다.

'닭은 적어도 자신의 홰 위에서는 왕이다.' 세네카의 말은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싸움이라면 이미 이력이 나 있다. 숱한 세월 자기 자신을 유폐시켜 투쟁력을 키웠다. 다른 닭이 위협해도 나무로 만든 닭처럼 꿈쩍도 않는다. 적어도 홰에 올라서면 시간을 지배한다. 물론 아침이야 닭이 울지 않아도 찾아온다. 한데, 홰에 오른 닭은 자신이 아침을 연다고 착각한다.

홰만 지키는 닭은 지금 대통령의 형상이다. 날이 밝아 이미 세상이 훤하다. 그런데도 시간을 지배하겠단다. 단연 압권은 검찰 수사의 거부. 검찰이 최순실 등과 공모한 피의자로 입건하자 나온 반응이다. 공모관계라 했지만 사실상 대통령이 주도하고 지시했다고 봤다. 인격 살인, 범죄 단정이란 게 청와대의 규정. 검찰 수사 거부와 '중립적 특검'을 거론했다. 여차하면 특검 임명도 거부하겠다는 선언이다. 청와대와 여당의 탄핵 요구는 뜬금없다. 시간 싸움으로 끌고 가겠다는 전략이다.

법치와 질서를 얘기하던 입으로 '법대로'를 외치고 있다. 법적 절차란 것은 모든 인간적 가치와 품위를 내던진 상태를 말한다. 통치의 기본은 예의염치라 했다. 그걸 다 던져버리고 법으로 결판내자? 국민의 신뢰, 사회적 정의, 국가적 위신…. 이런 건 안중에도 없다. 상상과 추측으로 지은 사상누각, 헌법적 권리 박탈, 정치적 공세, 국정 혼란….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지. 같은 하늘을 이고 살면서 말뜻이 이리 달라서야.

돌고 돌아 제자리다. 대통령 탄핵과 국회 주도 총리 선출, 과도내각 구성이라? 야 3당의 대선 주자 등 8명이 합의한 내용이다. 그 중 어느 하나 만만한 게 없다. 특검은 내달 중순께 시작돼 내년 4월에야 끝날 수 있다. 대통령이 특검 임명에 제동을 걸면 시간은 더 늘어진다. 탄핵이라고 다를까. 국회의원 3분의 2 찬성으로 가결돼도 헌재 심의절차가 최대 180일이다. 게다가 보수 일색인 헌재에서 탄핵을 가결한다? 시간만 끌다 나라 망칠 게 걱정스럽다.

총리 선출과 과도내각이라고 쉬울까. 인선과 임명 과정은 하세월이다. 어느 누구를 세우더라도 여야 간의 줄다리기는 뻔한 일이다. 합의가 된다 해도 대통령의 인준이 남는다.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겠는가. 청와대의 말뜻을 조합하면 대통령은 고유 권한을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하야와 퇴진은 물론 2선 후퇴도 않겠다는 것이다.

어찌 됐든 이번 사태는 장기전 양상으로 가고 있다. 새로운 각오와 인내가 필요한 시점이다. 나라가 백 척의 장대 위에 섰지만 한 발 나아가기가 힘들다. 대통령이 민심에 눈을 감고 체통을 버렸으니 남은 건 법 절차뿐이다. 이럴 바에야 개헌을 병행해도 나쁠 게 없다. 헌법의 맹점이 여지없이 드러난 상황이다. 특검과 국조, 탄핵과 중립내각에 개헌을 얹는다 하여 초점이 분산될 것도 아니다. 여당이 개헌을 제안했으니 야당에서 못 받을 이유도 없다. 홰에서 내려오길 거부하는 닭을 끌어낼 방법은? 닭집을 헐면 된다. 그게 개헌이다.

당장의 문제 해결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렇다면 판을 바꾸는 대변혁이 필요하다. 이번 일은 단순히 관련자들의 단죄로 끝날 문제만은 아니다. 70년 묵은 병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 것이다. 애써 깐 호박씨 한 입에 털어 넣는다더니 꼭 그 짝이다. 한 시대의 종언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조종이다. 그러니 이제는 갈아엎어야 한다. 오래된 묵정밭은 파 뒤집어야 다시 씨를 뿌릴 수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맹점은 여지없이 드러났다. 권력의 집중이 위험의 집중이니 권력 분산에 초점을 둬야 한다. 당원 자격 박탈과 공천 등 당내 문제 관여 금지는 당연한 조치다. 총리 임면권만 부여하고 총리가 헌법적 권한을 행사해야 맞다. 이번 사태처럼 대통령이 법적 문제가 있을 때 절차를 간소화하는 것도 생각해 봐야 한다.

특히 검찰, 경찰, 국세청, 감사원 등 권력기관의 독립은 필히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검찰이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웠다면 지금 같은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다. 미국처럼 직선제로 하든지 하여튼 변화가 필요하다. 정경 유착의 고리도 끊어내야 한다. 갖가지 정책적 특혜를 베풀고 권력을 활용해 대기업을 후려치는 폐단은 사라져야 할 것이다.

다시, 인고의 시간이다. 체면과 염치를 벗어던지고 벌거벗은 욕심만 남았다. 법대로라면 시간 먹는 하마다. 조급증 내고, 울화를 터뜨린다고 될 일은 없다. 뚜벅뚜벅 가야할 길이라면 후회 없이 갈 길을 택해야 한다. 이미 대한민국이 얼음 위에 지은 집이란 사실은 여실히 드러났다. 그 집을 헐고 단단한 반석 위에 다시 집을 지어야 한다.

논설고문 aiwi@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