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미르에 대한 이야기이다. 미르는 용을 가리키는 순수 우리말이다. 고대 중국의 신화집 '산해경'에는 기괴한 형상의 인간이나 상상의 동물이 등장한다. 인간 역사와 더불어 신격화된 동물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용(龍)이다. 상상의 동물 용은 우리말로 '미르'라 한다. 미르는 물을 가리키며, 물의 신은 용을 가리킨다. 그리고 미르는 미리(豫)의 의미와도 관련 있다. 그런 연유인지 우리의 역사를 보면 용은 미래의 메시아 미륵불의 신앙과 매우 관련이 깊다.
미륵신앙에는 상생신앙과 하생신앙이 있다. 미륵상생신앙은 도솔천에 거주하는 미륵보살을 직접 만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사후에 도솔천에 왕생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한편 미륵하생신앙은 미래의 메시아 미륵불이 석가 입멸 후 56억7000만 년 후에 도솔천으로부터 이 세상에 하생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3회에 걸친 설법을 통해 일체의 중생을 구제한다는 내용이 골자이다.
사람들은 석가 입멸 후 이 세상에 미래의 메시아인 미륵이 출현하면, 그의 설법을 통해 구원받고자 하는 내세관이 강렬하였다. 이러한 내세관은 난세에 구원받기 위한 우리들의 마음을 반영하며, 이를 표현하는 방편으로 경전을 암송하거나 사원을 짓거나, 불상과 불화를 조성하거나 향 등을 공양하면서 희망이라는 믿음을 깊이 간직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미르, 용, 미래, 구원, 미륵신앙은 지배자나 피지배자들이 겪는 어려운 현실세계로부터 이상세계를 구현코자 바랐던 염원이 반영된 것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순수한 전통 신앙이었다.
고대 우리나라에 미륵신앙이 널리 유포되어 있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평왕 때에 흥륜사 승려 진자는 미륵불상 앞에서 위대한 성인이 화랑으로 화신하여 세상에 출현해 주기를 발원하였다. 당시 화랑으로 이름을 떨쳤던 김유신은 그의 낭도들을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렀다. 이는 바로 미륵보살이 미륵불로 성불하여 용화수 아래에 내려와 세상을 이끌 듯이, 당시 청년 화랑들을 미래를 이끌 수 있는 미륵의 화신으로 보았던 것이다.
전북 익산의 용화산 남쪽에 있는 미륵사지는 백제의 유적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백제 무왕은 신라의 선화공주와 연을 맺기 위해 서동요를 지어 퍼뜨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 무왕이 어느 날 부인과 함께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 나타나므로,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세워주기를 청하였다. 이 연못을 평지로 메워 건물을 올린 것이 바로 지금의 미륵사지이다. 미륵사지는 2009년 미륵사지 석탑해체 발굴 당시 발견된 순금제 사리장엄구에 의해 639년에 창건되었고, 백제 무왕 때 왕비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지어진 사찰로 밝혀졌다. 이 같은 사찰 건립의 배경에는 왕권을 강화코자 하였던 백제 무왕이 정치적 기반이 쇠약해진 부여를 떠나 익산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코자 하였던 정치적인 전략이 깔렸던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미륵불이나 미륵마애불 조성이 빈번하였다. 미륵이 용화수 아래에 출현하여 설법하는 모습을 묘사한 '미륵하생경변상도'는 국보급의 화려한 불화로 일본에 여러 점 남아 전한다. 그 외 미륵신앙과 관련 있는 고려말~조선 초 매향활동도 무시할 수 없다. 향목을 묻는 매향 행위의 흔적은 매향비의 존재를 통해 알 수 있다. 지역적으로 해수와 육수가 만나는 지점인 동·서해안 및 남해안의 내포 지역에 매향비가 분포한다. 매향신앙은 의식절차에 따라 향목을 갯벌에 정성스레 묻어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귀한 향재인 침향목이 되기를 바란다. 매향활동의 배경으로 여러 견해가 있지만, 내우외환에 따른 혼란한 현실세계에서 벗어나 용화세계의 도래로 인해 미륵이 하생하여 구제해주기를 바라는 염원이 깃들어 있었다. 여기에는 조선 초 1427년에 세워진 홍성 매향비에는 마을의 노인과 어린이들이 미륵이 이 세상에 출현하여 첫 번째 설법을 기리며 매향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 내세에 대한 믿음을 엿볼 수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시두말성(翅頭末城)이라는 성이 만들어져, 땅이 기름지고 문명이 발달하여 많은 사람이 넘쳐나며, 여기에 전륜성왕이 출현하여 바른 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내용이 미륵경전에 담겨 있다. 지배층 권력자들은 자신이 전륜성왕이 되어 이상국가를 다스리고자 미륵신앙을 주도하였고, 민중들은 근심과 환란이 끊이지 않는 현실에서 벗어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기 위해 미륵신앙을 믿었다. 고달픈 현실세계로부터의 커다란 위무를 받았던 것이다. 미르, 미륵신앙은 우리들의 가슴에 보배를 간직게 한 뿌리 깊은 전통 신앙이었다. 사이비신앙으로 말미암아 우리 고유의 신앙, 전통 미르신앙이 절망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동아대 인문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