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창작물보다 흥미진진할 때가 많다. 재난영화 '판도라'가 그렇다. 감독은 앙시앵레짐의 적폐가 가득한 '판도라'를 열었다.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 은폐와 정부의 무능한 대응은 세월호 참사에서 차용한 듯했다. 사용후핵연료 저장수조 붕괴를 막기 위해 사지로 뛰어든 민간복구팀은 세월호 잠수사들이다. 대통령을 좌지우지하는 총리는 '비선 실세' 최순실의 데자뷔. 그래도 제작진의 상상력은 훨씬 더 끔찍한 현실을 넘지 못했다.

지난해 5월 동일본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일본 후쿠시마 현을 찾았다. 수소 폭발이 일어난 제1원자력발전소와 2㎞ 떨어진 거리에서 방사선량을 측정했다. "삐삐삐삐…." 휴대용 방사선 측정기가 요란하게 경고음을 울렸다. 모니터에는 5.95μ㏜(마이크로시버트)라는 숫자가 찍혔다. 생활 방사선량보다 60배 높은 방사능 수치다. 2시간 동안 머물며 노출된 방사선량은 이론상 흉부 엑스레이 1회 촬영치(10μ㏜ 기준)와 맞먹었다.

발전소에서 20㎞ 떨어진 오다카(小高)는 '죽은 도시'였다. 오염토 2040만t을 담은 검은 봉투가 곡식이 익어야 할 들판을 끝없이 점령하고 있었다. 방사선복으로 중무장한 제염·제선 인부들만 기자의 방문을 신기한 듯 쳐다봤다. 일본 정부에 따르면 동일본 대지진에 따른 직접 사망자는 1만8500여 명. 피난생활을 하다가 숨진 2차 사망자도 2000여 명에 달했다. 원주민 22만여 명은 방사능 물질이 무서워 아직 타향살이를 한다. '판도라'의 여주인공이 격납용고가 무너진 핵발전소를 멀리서 바라보며 숨진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장면은 그래서 비현실적이다.

영화에서 판도라 상자는 곧 닫힌다. 총리에게 휘둘리던 대통령은 정신을 차리고 국민에게 도움을 청한다. "무능한 정부를 대신해 희생할 지원자를 찾습니다." 세 번의 대국민 담화에서 유체이탈화법으로 변명하고 '악어의 눈물'로 동정심을 구했던 우리의 대통령과는 너무 다르다.

현실의 판도라는 언제 닫힐지 모른다. 오히려 작은 판도라 상자들이 여기저기서 열리고 있다.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로 닭·오리 2000만 마리가 살처분돼도 방역당국은 속수무책이다. 울산 군부대 폭발물 사고로 병사들이 다쳐도 지휘관은 은폐와 축소에 바빴다. 경제가 무너지고 가계부채가 위험수위에 달해도 경제 컨트롤타워는 무능하다. 폐족(廢族) 운명인 친박이나 비박은 오로지 생존 본능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한다. 대통령은 국정농단과 뇌물죄 혐의를 전면 부정하는 '탄핵소추답변서'를 통해 국민을 더욱 절망에 빠뜨렸다.

돌이켜보면 박근혜 정권 3년9개월은 경고음의 연속이었다. 오르는 집값·전셋값을 막아달라고 하니 '억울하면 집 사라'며 부동산 폭탄을 돌렸다. 최저임금 1만 원 인상 요구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장관이나 금융기관장은 임금피크제 대상에서 쏙 뺐다. 뜬금없는 국정교과서 제작으로 이념대립을 격화시켰다. '최순실 국정농단'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왜 대한민국이 비정상인지 알 길이 없었을 터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사고는 저거들이 쳐놓고 수습은 왜 맨날 국민이 하노!" 남자 주인공 김남길의 대사는 "이게 나라냐"고 외치는 촛불민심이다. 전문가들은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돼도 촛불이 꺼지지 않는 이유를 1987년 6월항쟁에서 찾는다. "절차적 민주화를 이뤘지만 과실은 고스란히 정치권으로 돌아갔다. 헌법 개정과정에서 광장의 염원은 철저히 배제됐다. 이제 국민이 주도권을 갖고 우리 사회의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김종민 박근혜정권퇴진 부산운동본부 공동대표)."

국민도 김남길처럼 판도라의 적폐를 청소하려 일어섰다. 박근혜 퇴진 시국서명에 동참했던 부산 교수·연구자 1100여 명은 20일 '앙시앵레짐의 마지막 저항선을 넘어서'라는 제목의 '새로운 대한민국 선언'을 채택했다. 그들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국정조사와 특검 수사는 촛불혁명의 1차적 성취"라면서 "촛불은 우리 시대의 적폐 너머에 빛나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바라본다"고 진단했다. 그들은 또 시민주권·사법정의·정의와 공정한 분배를 위한 실천 계획도 내놨다. 기득권 카르텔을 뚫고 마침내 새로운 대한민국을 세울 때까지 촛불을 멈추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부마민주항쟁과 6월항쟁의 주역인 부산이 다시 들고 일어선 것이다. 촛불은 쉬 꺼지지 않을 것 같다.

사회1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