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연극은 사회적 불안 가운데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한 페이시스트라토스 장군이 시발점이 된 참주의 출현에서부터 그 전성기를 맞이한다. 기득권을 가진 귀족들에 대항해 민중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그리스 비극을 그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농민들의 디오니소스 축제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였고 점점 연극경연대회로 발전시켜 나갔다.
'운명 비극'으로 정의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 연극은 신이 한 번 정해 놓은 법에 도전하는 인간의 몸부림은 한낱 물거품에 불과하다는 통치 의지를 시민들에게 심어 놓기 위해 비극의 주인공들에게 사회제도는 반드시 지켜야 하며 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요한다. 연극을 만드는 집단에게는 물질의 지원과 주어지는 명예를 통해 권력에 꼼짝 못 하게 만드는 통치 수단인 동시에 연극을 무료로 관람하는 시민들에게는 정권에 순종하도록 강요하는 수단이었다. 그런데도 연극은 대중들에게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며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해주는 위대한 예술로 승화되어 나갔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정권의 지원 아래 발전해 오던 연극예술은 메세나를 통해 더욱 승화되었다. 로마의 재상 마에케나스는 문화예술인들의 예술창작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로마의 예술이 꽃필 수 있게 했다. 관 위주의 고대 그리스 문화예술 정책이 귀족가문(기업)으로 후원의 주체가 바뀌었다. 역사적으로 정부나 귀족들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이는 문화적 부흥기를 누릴 수 없었다. 문화예술의 부흥은 먹고사는 문제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가치, 존엄성, 실존의 문제였다. 아무런 조건 없는 순수 문화예술의 지원을 통한 부흥은 또한 그 나라의 국력을 상징한다.
유럽 전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문예부흥(르네상스)을 주도했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사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사업이 좋은 영향을 미쳐 대중들이 좋아하도록 해야 하고 그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수많은 예술가를 후원하였다.
민간인의 국정 농단 의혹 사건 규명 공방 등으로 온 나라가 어수선한 가운데 가장 먼저 문화예술계가 얼어붙어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소문으로만 나돌던 블랙리스트의 실체도 드러났다. 정권마다 문화예술에 대해 편 가르기식 지원을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정권에 따라 문화예술을 후원하는 주체가 정부냐 민간이냐로 나뉠 수는 있지만 지원 받는 객체가 달라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던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 의해 블랙리스트가 업데이트되었다고 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고대 그리스 참주정치 시대에도 정권의 유지 차원에서 순수예술을 지원하였지만, 네 편 내 편으로 나누는 이데올로기적 이분법이 아닌 민중들의 사기진작과 삶의 편의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의 지원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블랙리스트에 의한 지원은 단지 좌파와 우파의 명확한 신분 증명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연장 선상에서 볼 때 '사람과 기술, 문화로 융성하는 부산'의 구호가 허공에 흩날리는 연기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부산시의 세심한 문화예술 지원 행정 시스템이 요구된다. 한정된 예산으로 부산문화재단을 통한 지원금 분배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연극예술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인식하여 연극단체에 대한 다양한 경로의 지원책 마련과 기업과 개인 후원의 활성화를 위한 주도적 기능을 담당해줄 것을 부탁한다.
지난해 제23대 부산연극협회장으로 당선될 때의 공약 중 하나는 '부산의 작품제작환경을 개선'이었다. 열악한 부산 연극예술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1년간 열심히 뛰었지만 연극예술에 대한 시나 기업의 인식들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정부 차원의 공공지원금에만 의존할 수 없다. 부산의 연극인재들이 더는 부산을 빠져나가는 것을 묵과할 수 없으며 올해도 부산시 예산 증액을 위해, 메세나 지원을 위해 올해도 열심히 뛸 생각이다.
올해 부산연극협회에서 신설한 '내일의 걸작'이라는 청년배틀 연극제작 프로그램을 통해 청년연극인들이 조금이라도 부산연극에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좋겠다. 새롭게 시도하는 예술감독을 통한 제35회 부산연극제가 성황리에 끝나 부산의 연극 활성화에 기여하고 메세나 기업들의 참여가 왕성해지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부산연극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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