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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답 없는 세상에서 답 정하는 이에게 /정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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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7-04-09 19:2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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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轉職)한 마당에 전직(前職)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그렇지만 오늘은 법관직에 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전체 법관 수는 대략 3000명가량 되는데 이들이 처리해야 하는 총사건 건수는 1년간 600만 건을 웃돈다. 업무량으로 보자면 나름 3D 직종이다. 그래도 직업만족도 1위가 판사인 걸 보면 행복한 3D 직종인 셈이다.

최근 법원 내부, 특히 법관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법원행정처의 사법개혁 관련 학술행사 축소지시 의혹 등을 계기로 불거진 '법관의 독립' 문제이다. 법원 내 최대 학술단체인 국제인권법연구회와 연세대 법학연구원은 지난달 '국제적 비교를 통한 법관인사제도의 모색-법관독립강화의 관점에서'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공동개최하였다. 여기서 일선 법관들이 법관의 관료화 폐해 등을 지적하며 "제왕적 대법원장의 권한을 분산해야 한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히기까지 해 사법개혁논란은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있었던 5차례의 사법파동은 모두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는 헌법 제103조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번 논란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법관의 독립은 그 자체가 중요한 가치이긴 하나 종국의 목표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법관의 독립은 법관이 외부세력과 조직 내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법적 양심에 따라 '제대로 된 재판'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토대라는 수단적 의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재판'이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사건의 시시비비를 잘 따져 그에 맞는 결론을 내려주는 재판을 잘된 재판이라 생각할 것이다. 실제 재판을 하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데 무슨 증거를 더 내라고 하느냐"는 말이다. "딱 보면 모르냐"는 말도 흔히 듣는 소리다. 이런 말들은 자신은 '시시(是是)'이고 저쪽은 '비비(非非)'라는 사실관계에 대한 판단을 전제로 법관도 그것을 당연히 알 것이라는 믿음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나 재판제도의 본질은 사건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법관에게 판단을 받는다는 데 있다. 심지어는 법관이 사건이나 당사자를 알 경우 제척, 기피, 회피제도를 통해 그 재판에서 배제되기까지 한다. 그러니 딱 보면 모르냐는 이야기는 틀린 말이다. 그러나 걱정 마시라. 우리나라 판사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어릴 때부터 치열한 경쟁을 뚫은 객관식의 달인, 주관식의 명장들이다. 사법연수원 시험의 경우 모든 유형의 문제가 출제되는 시험의 끝판왕이다. ○×형, 괄호 넣기, 5지 선다형 객관식, 단답형, 논술형 주관식을 비롯해 8시간에 걸친 사례형 시험까지 골고루 갖춘 게 사법연수원 시험이다. 이런 과정을 통과한 이들이 판사들이다. 그러니 판사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판사들이 맞고 틀림에 대한 동물적 감각을 타고난 이들이라 하더라도 그 사건을 직접 겪은 당사자들보다 사실관계를 더 잘 알 수는 없다. 명확한 증거가 없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런 점에서 시시비비의 성패를 제대로 된 재판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

재판의 성패를 당사자의 절차적 만족감에 두는 입장 역시 전적으로 수긍하기는 어렵다. 법관이 당사자의 말을 잘 들어주고 증거신청을 다 받아주더라도 결론에 대해 당사자가 납득할 수 없다면 만족감보다 오히려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물론 절차적으로 충실한 재판을 받은 당사자들이 결론에 수긍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생각되나 실제 그러할지는 하늘과 땅만이 알 일이다.

재판의 목적은 종국적 분쟁해결이다. 분쟁을 종국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터 잡아 현재를 재단하면서도 당사자들이 같이 살아갈 수 있는 미래를 추구하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과거의 잘잘못을 가리는 데 집착하거나 절차적 만족감에만 초점을 맞추는 재판은 좋은 분쟁해결 방법이라 할 수 없다. 인간에 대한 연민은 가지되 인간에 대한 예의는 지켜주는,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과거의 옮고 그름은 가리되 당사자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법관에 의한 재판이 우리가 바라는 법정의 모습일 것이다.

점점 답이 없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저잣거리의 다툼부터 대통령의 일신과 국가의 중대사까지 법원으로 몰려오고 있다. 법관들이 흔들리지 않고 법과 양심에 따라 과거와 미래가 화해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하기를 진심으로 기대해 본다. 그래야 답 없는 세상에서 조금이라도 희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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